덜컹거리는 버스 안,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은재’는 다르다. 올해 대학에 입학해 갓 상경한 그녀에게 서울의 풍경은 낯설기만 하다. 살짝 열린 차창 사이로 들이치는 바람 탓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그녀이지만, 여전히 시선은 창밖 풍경에 고정되어 있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그녀의 새 보금자리가 되어줄 쉐어하우스, ‘벨에포크’였다.4명의 하우스메이트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은재. 생판 남들과 한집에서 사는 것을 만만하게 본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실전은 상상 이상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이 명제가 당연하다 여겨지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민 혁명이 일어난 18세기 이전까지 신분제는 의심의 여지 없는 당연한 제도였고, 신분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을 차별하고 억누르는 행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다. 탐관오리를 물리치고 백성을 구하기 위해 일어난 농민들은 폭풍처럼 일어나 불꽃처럼 스러졌다. 농민들의 외침이 전국 팔도를 휩쓸던 1894년의 동학 농민 운동으로부터 130년이 지난 2024년, 기자는 더 나은 세상을
여기 출구를 찾아 나선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미정’. 미정은 자신이 단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적도,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사랑으로 가득 찬 적도 없다고. 이전에 만났던 남자는 그녀를 가득 채워 주긴커녕 그녀에게 돈을 빌리고 잠적한 상황. 그녀는 이 답답한 상황을 뚫고 나가기 위해 ‘해방일지’를 쓰기 시작한다. 첫 장의 제목은 ‘좋기만 한 사람’. 기자는 그녀의 해방일지를 따라 길을 나섰다.경기도 외곽, 산포시에 사는 미정의 출퇴근길은 고달프다. 아침 7시부터 집을 나서 노란
“만약 기억을 통조림이라고 친다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영화 은 1990년대 홍콩의 향취를 한껏 풍기는 작품으로 왕가위(王家卫, 1956~) 감독 특유의 분위기가 담고 있다. 이별을 마주한 경찰 ‘663’과 ‘하지무’, 그들 앞에 나타난 여점원 ‘페이’와 ‘노랑머리 마약밀매 중계자’. 기자는 그들이 만들어 가는 독특한 이별과 새로운 만남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았다.여느 때와 같이 스튜어디스 여자 친구에게 줄 샐러드를 사러 간 경찰 66
어느 날 갑자기 초자연적 존재가 나타나 죽음을예고한다. 우리가 신이라고 말하는 존재는 심판을 통해 지옥으로 가게 될 인간을 지목하고, 시간이 되면 어디에 있든 그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지옥행을 선고받은 인간들은 알 수 없는 존재인 '지옥행 사자'들에 의해 아주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때, 신의 뜻을 전한다는 단체 ‘새진리회’와 새진리회 의장 ‘정진수’가 등장한다. 새진리회는 이러한 처벌 과정을 ‘신의 심판’에서 비롯된 처형이자 ‘시연’이라 부르며, 모든 것은 ‘신의 의도’를 바탕으로 인간 사회를 더 정의롭게 만들고자
'코다(CODA)'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코다는 악곡 끝에 덧붙이는 음악 기호를 뜻하기도, 청각 장애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聽人) 자녀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드라마 (tvN)의 주인공 '은결'은 그중에서도 후자의 의미를 지닌 채 태어났다. 드라마는 열여덟 남학생 은결이 우연히 1995년으로 시간 여행을 하면서 겪게 되는 사건과 그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자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서로 다른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던 은결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비바 할아버지: 이건 음악 하는 사람들끼리 만든
기자의 기행(紀行)은 기차 위에서 시작한다. 햇빛 한 줄기 없는 우중충한 날씨와 함께 수도권 전철 3호선 열차를 탔다.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 (1997)의 촬영지에 다녀오기 위해서다. 수도권 전철 3호선의 일산선은 일산과 서울을 이어주는 몇 안 되는 지하철 노선으로, 일산이 1기 신도시로 지정되면서 1996년 노선이 확충됐다. 일산신도시가 개발되기 시작한 이 때가 의 시대적 배경이다. 영화는 군대에서 막 전역한 26살 청년 ‘막동’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변해버린 고향에 적응하려 애쓰는 청년을 비춘다. 그중에서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위치한 노량진역은 수도권 지하철 1호선과 9호선이 만나는 유일한 역이다. 수산 시장부터 사육신공원, 노량진 곳곳에 자리한 학원가까지. 다양한 장소에 걸맞게 다양한 사람이 오가는 이곳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김애란의 단편에는 유독 노량진이라는 장소가 자주 등장한다. 기자는 김애란 작가의 단편들인 「건너편」, 「자오선을 지나갈 때」, 그리고 「서른」의 배경인 노량진 일대에 방문했다. 1999년 3월. 나는 처음 노량진역에 하차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갯바람 냄새가 났다. 대부분 노량진 수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6)은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존재했던 계층적 갈등과 도시 빈민의 삶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 속의 ‘난장이’는 빈부와 노사의 대립 과정에서 억압당하며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상징한다. 기자가 이 소설을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문학 시간이었다. 기자의 기억 속에 이 소설은 동화 같은 분위기 뒷면에서 사회의 냉혹함을 표현한 작품으로 남아있다. 난장이 가족이 살았던 낙원구 행복동의 배경은 서울시 중구 호박마을이다. 호박마을은 중구 중림동 일대의 마지막 달동네이며, 현재 남아있는 주민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고민을 품고 살아간다. 특히 한창 예민한 청소년기에는 사소한 고민도 크게 다가올 것이다. 모두가 그 나이에 하는 고민은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라 하지만, 여기 한창 일생일대의 고민에 놓여있는 소년이 있다. 늘 억울한 표정을 지은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이 열네 살 소년의 이름은 ‘보희’다.보희는 어릴 적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미용실을 운영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문득 집에 이상하리만치 아버지의 흔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던 중, 어머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불쾌한 감정이 정확히
우리는 종종 잘못된 선택을 하곤 한다. 그 이유는 피치 못할 개인의 사정, 순간의 착각과 오해 그리고 자기합리화 등 다양하다. 완벽한 인생은 없기에, 누구나 한 번쯤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건, 잘못된 행동을 저지른 뒤 행하는 나의 선택이다.9년 전 개봉한 영화 (2014)은 소설 『How to Steal a Dog』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외국 소설을 한국 정서에 맞게 잘 각색했으며 귀엽고 아기자기한 연출과 탄탄한 이야기 전개로 호평받은 바 있다. 영화는 내내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흘러가기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별 헤는 밤 中- 내외부적인 압력 속에서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변치 않은 채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대의 고통 속이라면 더더욱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통해 꾸준함을 실천한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시인 윤동주’다. 안소영 작가의 『시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1973~) 감독은 (2022)의 개봉으로 재난 3부작을 완성했다. (2017), (2019), 은 모두 재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감독은 위 영화들을 통해 재난을 막아내거나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을 향해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기자는 감독의 작품에 위로 받은 관객 중 한 명으로서 영화가 사실적이지만 환상적으로 담아낸 도쿄를 찾아 가기로 했다. 미야미즈 히토하: 실을 잇는 것도 무스비(結び)
여기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젤리’를 보는 능력을 타고난 한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안은영’, 목련고등학교의 보건교사다. 방금 말한 젤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먹는 젤리가 아니다. 그건 사람의 감정일 수도, 누군가의 흔적일 수도, 죽은 자의 영혼일 수도 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두 무슨 헛소리인가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이 젤리를 빼놓고 은영의 인생을 이야기할 순 없다. 총 6부작으로 이루어진 넷플릭스(Netflix) 오리지널 시리즈 (2020)은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안은영의 인생
사람은 누구든 자신만의 목표가 존재한다.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말이다. 또한,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저마다 노력한다. 다만, 과도하게 높은 목표를 설정한 사람들에게는 역경이 따르기 마련이다. 갖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이뤄낸 사람들에게 우리는 찬사를 보내곤 한다. 여기,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오직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한 청년이 있다. (JTBC)의 ‘박새로이’라는 청년이다.한때 경찰을 목표로 했던 박새로이. 그러나 그의 인생은 전학과 함께 크게 요동친다. 전학 온 첫날, 그
“1961년 5월 16일, 한 무리의 군인들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세력은 제3공화국을 출범하는 한편, 한국 최초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를 설립했다...(중략)... 남산에 자리한 중앙정보부는 그 존재만으로 공포의 대상이 됐다. 대한민국의 2인자로 군림했던 중앙정보부장들을 사람들은 ‘남산의 부장들’이라 불렀다.”영화 (2020)의 시작을 알리는 자막이다. 영화는 10·26 사태가 발생하기 전 40일간의 이야기를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해 다룬다. 10·26 사태는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 서
기구하다. 어느 인간의 삶이 이토록 기구할 수 있는가? 『김약국의 딸들』(1962)을 읽는 내내 기자의 머릿속을 지배한 감정은 연민을 뛰어 넘은 불편함이었다. 6장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인 작가 박경리(1926~2008)의 『김약국의 딸들』 ‘김약국’과 그의 다섯 딸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의 하루하루를 그려 다분히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행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일생은 어떤 의미로 ‘판타지’였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그 가족의 이야기에 기자는 자꾸만
서울의 공기는 참 다양하다. 작년 2월 말, 기자는 본격적인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가끔 놀러 오던 이곳이 이젠 마음 붙여야 할 곳이 된 것이다. 배정받은 기숙사 방에 짐을 풀었다. 건물에선 한강이 내려다보였고, 조금만 걸어 나가면 감성 넘치는 식당과 카페가 즐비했다. 화면으로만 보던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기도 하고, 깜깜한 밤에도 사람들은 반짝이는 모습을 하고 이곳으로 몰렸다. 기자는 오묘한 설렘에 휩싸였다. 설렘을 가지고 바라본 서울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에너지가 느껴졌고, 매번 기분 좋은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또 어떤
김종관 감독의 은 7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소설가 ‘창석’이 총 5개의 에피소드에서 5곳의 장소와 5명의 인물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창석은 자신이 발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런 창석에게 작중에서 아무도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김종관 감독이 『씨네 21』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제목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해 “반어적인 의미가 담긴 제목이다. 사람들이 제목을 보고 여러 의문점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답한 이유다. 창석과 그와 대화를 나누는 모든 인물은 영화 내내 ‘
우리는 종종 SNS를 통해 세상에 우리를 드러낸다. 그리고 SNS는 우리를 모르는 사람과 연결해주기도 한다. 때로는 SNS에서 만난 인연이 일상에서 만난 인연보다 흥미롭고 소중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 뒤늦게 사춘기가 온 아저씨가 있다.프랑스에서 낡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스테판’은 장성한 두 아들을 둔 아저씨이다. 스테판은 큰아들의 결혼식 당일, 큰아들이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는 아들이 동성애자이며 이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는 다른 가족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을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