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 송수남(南天 宋秀南, 1938~2013)은 한국화의 현대화로의 담론 가능성을 제기했던 작가이다. 그는 1960년대에 발묵(發墨)에 주목하는 추상작업을 선보였고 1970년대 초반에는 과감한 색채의 산수화를 발표하였으며, 1975년 스웨덴 국립동양박물관(스웨덴)에서의 개인전을 기점으로 수묵으로 전환하여 수묵으로 한국의 자연을 묘사하였다. 1980년대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수묵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송수남은 수묵화운동을 주도하며 본교 동양화과 출신의 제자들과 함께 동양화단에서 수묵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특히
작가 윤미란(1948~)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각각 1971년, 1982년에 졸업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의 수학 후 홍익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윤미란은 1980년대부터 단색화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1985년 , 1986년 등의 단체전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간다. 하지만 윤미란은 동시대에 활동한 다른 단색화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주목 받는다. 이는 추상미술계에서의 여성 화가 연구가 비교적 최근에 시작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한지와
고려시대 차(茶) 문화는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생성되었고 이후 고려 독자적인 음다풍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차 문화는 찻잎과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다구(茶具),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구성된다. 그 중 다구는 은은한 푸른빛을 띄는 청자가 주를 이룬다. 이번에 살펴볼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의 기형인 완(碗)은 입지름이 넓고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으로 바닥에는 굽이 둘러져 있다. 차(茶)를 마시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차를 따라 마시는 잔(盞)은 문양이 잔 바깥쪽에 시문되어 있는
갈대와 기러기가 함께 있는 노안(蘆雁)도는 노년의 편안함을 뜻하는 노안(老安)과 같은 의미로 통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17세기까지의 노안도는 속세를 벗어난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주로 물가에 앉아있는 사대부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18세기 이후에는 노안도의 수요가 확대되었고 갈대와 기러기를 의미하는 노안(蘆雁)과 음이 같은 ‘노후의 평안(老安)’이라는 길상적인 의미가 더해지면서 더욱 유행하였다. 이렇듯 노후의 편안한 삶을 기원하는 노안도는 크게 각광 받았으며 궁궐이나 상류층에서 병풍으로도 활용되었다.
‘묶기’ 조각, ‘한국 미술의 선구자’ 등 한국의 실험미술가로 잘 알려진 이승택은 1959년에 홍익대학교 조각과를 졸업했다. 그는 러시아의 구성주의, 사실주의의 화집과 여러 서구 조각들을 접하면서, 세계 조각의 흐름을 공부했다. 선구자라는 말에 걸맞게 대학시절부터 기성에 저항하는 반항적 작품을 만들어온 그는 1958년 졸업전시에 출품한 에서 포물선 형태의 석고 덩어리를 가시철망으로 감은 조각을 출품했다. 한반도의 역사와 아픔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은 당시 전통적인 재료로 형상을 빚어낸 구상조각들 사이에서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인 김윤신(1935~ )은 1959년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여 1964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판화를 공부하였다. 이후 1969년 귀국한 뒤 김정숙, 윤영자 등과 함께 한국여류조각가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한국미술청년작가회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0여 년간 한국 조각계에서 활발히 활동한 김윤신은 새로운 자연환경과 재료에 대한 열망으로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창작활동을 지속하였다.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김윤신은 한국 기후에서 접하기 어려운 단단하고 크기가 큰 아르헨티나 현지 나무를 재료로 삼아 조각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은 소정 변관식과 더불어 근대기 사경산수화를 대표하는 동양화가이다. 1914년 그는 최초의 근대식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에 입학하여 1918년 4월에 졸업할 때까지 안중식을 사사하였다. 당시 그는 안중식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화려한 구성과 색채감이 강조된 궁중벽화인 (1920)를 제작하였다. 또한 스승이었던 안중식의 화숙인 경묵당(耕墨堂)에 기거하며 자연스럽게 서화협회에 참여한 그는 1921년 1회부터 1936년 15회
박현기는 백남준을 이어서 한국 비디오 아트의 1세대에 속하는 작가로 평가 받는다. 194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박현기는, 1961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지만 이후 건축학과로 전과하여 졸업한다. 그는 회화라는 매체가 가진 평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건축을 택했다고 말한다. 그는 비디오라는 조형 매체를 토대로 소위 건축적 설치 작업을 보여주며, 회화와 분리되는 독특한 자신의 조형 세계를 구축했다. 박현기는 1970년대 초반 서울의 미술계를 떠나 대전으로 내려간 직후, 미술잡지를 통해 초창기의 비디오 아트를 접한다. 그는
프랑스 태생의 화가 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 1928-1999)는 견고한 뎃생과 거칠고 운동감 있는 선을 활용한 표현주의 화가다. 그의 나이 30살이 채 되기도 전에 화단과 평단, 대중의 주목을 고루 받으며 성공을 거두었던 뷔페는 왕성한 창작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작품을 남긴다. 그의 삶은 나치 치하의 파리에서의 어린시절, 어머니의 때 이른 죽음 후에 입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의 공동 창립자가 되는 베르제(Pierre Bergé)와 맺었던 긴밀한 관계 등 굴곡이 가득했다.마치 그것을
“조선 여인의 향취가 가득한 민예품 및 민속품에서 미의 본질을 찾았다. … 현대적 감각으로 다룬 이 작품들은 그의 풍아(風雅)와 운치로써 이미 과거가 아니고 현재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지향 이숙자의 작품에 대하여 미술평론가 석남 이경성이 남긴 평이다. 1967년부터 1978년까지 홍익대학교 초대 박물관장이었던 이경성은 제자인 이숙자의 첫 개인전 《이숙자 한국화전》(1973)에 서문을 써주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는 박물관의 소장품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숙자는 1963년에 홍익대학교에 입학하여 천경자에
하종현은 1935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59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1969년에는 전위 미술가 그룹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했으며, 1974년까지 AG 회원으로서 진보적이고 도전적인 작품들을 실험했다. 그는 앵포르멜에서 시작하여 탈회화 작업을 거쳐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마대 캔버스와 물감의 물성 표현에 착안한 회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때 제작된 것이 《접합》 연작(1974년~2000년대)으로, 《접합》 연작은 마대 천과 배압법이 그 특징이다. 《접합》 연작에 쓰인 올이 굵은 마포는 하종현의
“내 모든 작품은 몬트로이그(Mont-roig)에서 잉태된다.”추상과 초현실주의적 환상으로 자연을 탐닉하고 시적인 예술세계를 펼쳐 보인 스페인의 미술가 호안 미로는 화폭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기호와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조형미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머물렀던 마요르카, 파리(1920년대), 뉴욕(1940년대), 일본(1960년대) 모두 그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우리 박물관 소장품의 제목이기도 한 ‘몬트로이그’는 그에게 충격을 던지는 근원적인 땅으로, 그가 평생 작품과 삶 속에서 회귀하고 힘을 얻는 자기 존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