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속초행 고속버스에 탑승했다. 기자가 속초에 처음 간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다. 겨울 바다를 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스무 살 소녀는 속초 바다의 시원한 바람과 알싸한 내음을 잊지 못한 채 어느덧 기자란 이름으로 속초를 다시 찾았다.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두 시간 반. 좌석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사이 기자는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이윽고 햇살이 눈부셔 밖을 보니 한가득 눈이 쌓인 산등성이가 보였다. 올해 겨울엔 눈이 별로 내리지 않아 내심 서운한 마음이 컸는데, 그
‘집채덩이 같은 불안을 속에다 삼키고 있으니 무엇에도 마음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남원으로 떠나기 전, 기자의 불안감은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안에서는 이미 곪아있었다. KTX를 타고 남원으로 향하면서 드는 고민의 범위는 넓고 깊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군 문제와 취업 문제 등에 대한 선택의 길목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혼불』(1996)의 ‘강모’도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삶 속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에서 기자와 비슷하다. 그는 얼굴도 모르고 혼인한 ‘효원’을 아내로 두고 있으면서 사촌 동생 ‘강실’을
유독 바람이 따뜻하게 불어오던 날, 기자는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며 덜컹거리는 인천행 지하철에 올랐다. 따뜻한 공기와 도란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간간하게 들려오는 덜컹-소리가 한데 섞여 기자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종점인 인천역으로 향하는 길에서, 요즘 기자를 지독히도 괴롭히는 고민거리에 대해 떠올렸다. ‘꿈’. 이 간단한 한 글자가 계속해서 기자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여느 20대 청춘에게 그러하듯, 기자에게도 꿈이라는 단어는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그런 기자에게 『변사기담』(2016)의 주인공, 기담은 선망의 대
‘곧 비행기가 착륙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섬, 제주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제법 바람이 쌀쌀하게 부는 1월의 마지막 날, 기자는 기자의 고향이자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섬 제주에 발을 디뎠다. 방학에도 계속되는 신문사 일과 아르바이트, 인간관계에서의 미묘한 마찰에 질리려던 찰나였다. 『깊은 숨을 쉴 때마다』(1994)의 화자인 ‘나’도 그러했다. ‘나’는 독일로 출장을 간다는 핑계로 잠시 일상을 떠나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기 위해 제주로 떠난다. ‘나’처럼 우울한 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희망을 얻고 오리라. 공항 밖으로 나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 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중략…) "앞으로 십 킬로 남았군요""예, 한 삼십분 후엔 도착할 겁니다" 순천에 도착하기 전, 삼십분 남짓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과 기차에 몸을 맡기니 자연스레 따라오는 결과였다. 오랜만에 탄 기차에 삼십분 정도밖에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꽤나 야속했다. 흐르는 기차와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지루한 수업, 버거운 기사 마감, 지속되는 스트레스 그리고 소소한 행복…. 기자의 일상이다.
내리쬐는 햇볕에 기자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창밖은 8월의 무덥고 찝찝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이야 그 더운 공기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지만, 기자가 경주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여름은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뽐내고 있었다. 경주로 떠난 여행은 오랜만에 가는 가족 여행이었다. 짐을 한가득 싣고 올라탄 차에서 ‘여행’이라는 말이 주는 오묘한 설렘에 다들 마음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기자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계속되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부터 나섰던 여행길이었기에 가족들은 모두 피곤한
“전라남도 강진 한 명이요.”자그마치 5시간을 달려 강진 터미널에 도착한 후, 배차 간격이 족히 50분이나 되는 ‘남창행’ 농어촌 버스에 몸을 실었다. 군내에 잠시 마실 나오신 듯한 할머니들 네 분과 푸른 눈이 인상적이었던 외국인 두 명, 그리고 밀짚모자를 눌러 쓴, 쉰 살 쯤 돼 보이는 한 남자가 헐레벌떡 탑승하자 버스는 한적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알아듣기 어려운 사투리로 만담을 나누시던 할머니들이 내리고, 이어 자그마한 공장이 전부인 듯한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외국인들도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역을 중심으로 호텔과 백화점이 줄줄이 들어선 수원역은, 그야말로 북새통과 다름없었다. 저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각종 호객행위, 그리고 전도사들의 종교 권유를 피해 기자는 팔달문으로 향하는 버스에 재빨리 몸을 실었다. 수원역에서 팔달문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버스에 기대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 어느새 버스는 ‘수원행궁’ 앞에 정차했다. 내려서 조금 걷다보니 우뚝 솟은 팔달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의 중심부에 남대문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수원에는 팔달문이 도심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
어릴 적 날씨가 좋으면 할머니와 손을 잡고 인근의 명성황후 생가를 거닐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기자가 다시 찾아온 날, 이곳의 날씨는 가시지 않은 장마 전선이 하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듯 끈질기게 어두침침했다. 그러다 문득, 이곳에 들를 때마다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명성황후를 보면 과거 힘들었던 옛 여인들이 생각난단다. 그 누구보다도 강인했던 그녀의 정신이 지금의 이 할미를 있게 했단다.” 경기도 여주에서 평생을 보내셨던 할머니의 인생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어쩌면 명성황후는 단순히 한 나라의 왕비가 아니라 자식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니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부딪혔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들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리쬐는 햇살은 바람이 머물다 간 기자의 이마를 따뜻하게 해주기 적당했다. 하늘은 너무 맑아 졸린 눈을 트이게 해주었다. 햇살이 기자의 눈을 찌푸리게 할 때 즈음, 다시 앞을 보고 길을 걸었다. 가을. 사람들은 이러한 날씨를 흔히 그렇게 부른다. 기자 또한 그들의 선택을 조용히 따라한다. 가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다.이효석 작가의 『메밀꽃 필 무렵』은 가을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메밀꽃, 달밤,
“경주에서는 능을 보지 않고 살기는 힘들어요.” 우리는 사는 동안 죽음을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여기 도심 한가운데 무덤이 있는 곳, 죽음과 삶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있다. 바로 경주다. 경주는 수학여행의 메카라고 불리며 많은 이들에게 학창시절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영화 는 이와 전혀 다른 경주의 매력을 보여준다. 영화 (2011)가 파리의 아름다움을 조명한 영화라면, 는 경주를 느리면서도 고요하고 묘한 느낌을 주는 공간으로 표현한다.영화는 한 사람의 죽음으
8월 중순, 견디기 힘든 무더위가 막바지에 다다르며 기승을 부리던 즈음 파리에 도착했다. 거리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끈적임 없는 공기에 이정도면 더위로부터 잠시 피신을 온 거라 생각해도 무방할 듯했다. 파리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도 한참 지나 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샹젤리제 거리는 여전히 낮처럼 밝고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도착하면 로맨틱한 야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파리의 첫 인상은 이곳을 찾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시끌벅적한 장터 같았다. 과연 전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군산은 전라북도에서 제일 먼저 부(府)로 승격된 곳이다.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이 된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경술국치는 조그만 어촌에 불과했던 동네를 서해안의 주요 항구도시로 변화시켰다. 일본제국은 군산을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한 통로로 사용했고,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는 항구에 쌀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며 ‘쌀의 군산’이라고 외쳤다. 채만식(1902~1950)의 소설 『탁류』(1937)는 바로 이 시기의 군산을 다룬다. 그는 여러 인물을 통해 당대 사람들이 겪은 아픔과
무언가 기도를 간질이는 듯한 느낌에 목이 헐도록 헛기침을 반복한 경험이 있는가? 가능하다면 목구멍 안에 손을 넣고 그 얍삽한 무언가를 끄집어내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지금부터 기자는 알 수 없는 이 무언가에 괴롭힘당하며 발버둥 치던 한 여인의 자취를 따라가보려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2007)은 소설가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1985)를 원작으로 한다. 소설은 평범하던 한 여인의 영혼이 처참히 무너져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경상남도 밀양에 신애를 데려다 놓은 채 이야기를 끌어간다.
한낮의 잠실새내역은 사람으로 붐볐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곧게 뻗은 도로를 보니 멀리 새로운 잠실의 랜드마크인 롯데월드타워 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이 지역은 한 채 당 시가 15억 원이 넘나드는 고액의 부동산이 1만 세대가 넘게 있는 곳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사를 내뱉게 만드는 이 지역은 소설 『잠실동 사람들』의 주 무대이다. 소설가 정아은이 2015년에 출판한 장편소설인 『잠실동 사람들』은 서울특별시 송파 구 잠실동을 배경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룬 작품이다. 소설은 계급을 상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고등학교 국어 수업시간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생이던 기자는 수험생활이라는 감옥에 갇혀 문학 작품을 시험의 일부로만 취급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석(1912 ~ 1996) 시인의 작품을 공부하던 도중 「통영(統營) 1,2」이라는 시를만나게 되었다. 「통영(統營) 1」을 읽을 땐 그저 경상남도의 통영이라는 도시를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2편을 읽으면서 백석 시인에게 통영이란 곳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닌 어떤 사연이 담긴 장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관련 서적을찾아보다 이 작품이 백석
과연 이 소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단순히 줄거리만 이야기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장강명 작가의 데뷔작『표백』은 주인공인 ‘나’가 대학에서 만난 세연이라는 후배의 자살 선언과 그 추종자들의 연이은 자살로 인해 ‘나’를 포함한 남겨진 주변 인물과 사회에 미친 파장을 다루고 있다. 소설이 담고 있는 것에 비하면 건조하기 짝이 없는 요약이다. 그러나 기자는 더 이상의 해석을 시도할 수 없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제목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니체의 저서 『선악을 넘어서(Jenseits von Gut und Bos
삼엄한 공장과 노동자들, 공단이 있는 소설 속의 구로동. 그곳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려온 기자는 낯선 거리 가운데 덩그러니 놓였다. ‘이 부근 어디일 텐데...’ 돌연 차에서 내려 벙벙하게 서있던 기자에게 펼쳐진 광경은, 다름 아닌 거대한 대형 아웃렛과 쇼핑몰을 메운 인파들이었다. 디지털단지 사거리는 떡볶이와 어묵, 꼬치 등 길거리 음식의 잡다한 냄새들로 가득했고 이는 곧 기자의 코를 정신없이 들쑤셨다. 여느 서울의 역세권들과 다름없는 이 장소는, 1994년과 1995년 신경숙 작가가 그녀의 장편소설 『외딴방』에서 떠올린 자신의 열일
해가 구름 사이로 고개를 스윽 내밀며, 언제 추웠냐는 듯 햇볕을 내리쬔다. 거리에는 봄노래가 들리기 시작하고, 학교에는 봄 향기가 나기 시작한다. 간만에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나선 기자는 앞으로 기자가 마주 서야 할 공간이 그리 봄처럼 따뜻하지는 않아 마음 한쪽이 먹먹해졌다. 지난, 3월 4일(일). ‘SBS 일요 특선 다큐멘터리’에서는 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야경이 아름답고 데이트 코스로 우리에게 친근한 남산. 하지만 남산은 가슴 아픈 우리의 과거를 품고 있었고 기자는 그 현실을 향해
떠나는 길이 익숙하지 않았다. 모처럼만에 서울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 노곤하게 느껴졌다. 따뜻해진 3월이었지만 새벽바람은 여전히 날 서 있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전 6시 30분, 이른 새벽시간에도 용산 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등산복을 입은 이들은 여행 생각에 상기된 모습이었으나, 정장을 입은 이들은 왠지 모르게 초조한 모습이었다. 기자는 그 누구에도 속하지 않은 채, 여수행 열차에 올랐다. “여수 엑스포역으로 가는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승객 여러분은 …”정선도 그랬다. 여수로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