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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각자의 아픔을 딛고, 성장하며 살아간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은 청춘의 아픔,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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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생각하는 시기, 사춘기(思春期). 사람은 누구나 사춘기를 겪는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급격한 변화에 우리는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기도 하고, 순간의 일탈에 몸을 맡기기도 한다. 그 과정은 즐겁기보단 수많은 아픔과 슬픔을 겪으며 성장해가는 과정이다. 여기 죽을 만큼 아프진 않은 성장통을 겪고 있는 한 소년이 있다. 소설은 용화공고 3학년인 태만생의 부모님이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정하면서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부모의 부재로 인해 만생은 떠밀리듯 집을 나와 학교 근처의 옥탑방에 혼자만의 조촐한 살림을 차린다. 하지만 그렇게 외로운 삶은 아니다. 만생은 같은 시기를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때로는 사랑을 하기도, 때로는 가족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성장해간다. 『죽을만큼 아프진 않아』는 ‘봄을 생각하는 시기’라는 말에 걸맞게, 언젠가 찾아올 봄을 생각하며 추운 겨울을 오롯이 견뎌내는 우리네 10대를, 청춘의 고민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기자는 어디선가 씩씩하게 삶의 진창을 넘어서고자 애쓰고 있을 만생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 꼭대기에 도착하자 너른 옥상이 펼쳐졌다. 콘크리트 바닥에 파란 페인트칠이 되어 있어 꼭 바다 같았다. 순간 나는 앞으로 그 바다의 이름을 태평양이라 부르기로 결심했다.” (중략···) “태평양 위에 둥둥 떠 있는 두 개의 옥탑방. 비록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옥탑방과 나의 옥탑방은 서로의 부표가 되어 줄 것이다.”

 

만생은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할지 아니면 바로 취업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지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 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는 담임과의 상담에서 충동적으로 졸업 후에 바로 취업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되겠다거나 가진 기술을 써먹는 데에 뜻이 있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닌, 단지 취업준비생이 학교 출석에서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부모님의 ‘이민 선언’을 듣게 된다. 만생은 부모님이 이민을 떠난다고 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만 막상 그 날이 다가오자 왠지 모를 외로움과 허탈감이 그를 감싼다. 이제 만생에게 남겨진 것은 조촐한 옥탑방과 몇 안 되는 초라한 가재도구, 부모님과의 기억 뿐이다.

 

“그러니까 이태원에서 조선, 즉 한국인이 비주류였던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인거라···” (중략···) “엄밀히 말하면 여긴 코리아가 아니야. 이 땅은 원래부터 이방인 자식들의땅이었으니까 가방으로 치자면 짝퉁이 진퉁이 되는 동네고, 진퉁이 짝퉁이 되는 곳이란 말이지.”

이태원(梨泰院). ‘다를 이’에 ‘모양 태’.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이 사는 동네. 이태원은 그 이름에 걸맞게 기자가 지하철역을 채 빠져나오기도 전부터 ‘이곳은 한국이 아니야!’라고 소리치는 듯 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낯선 언어와 큰 여행 가방을 끌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외국인들, 모양조차 생소한 언어로 쓰인 인사말까지. 소설 속 구절처럼 이곳에서 기자는 영락없이 다른 나라를 방문한 외국인이었다. 태만은 부모님이 미국으로 떠나자마자 친구 태화의 권유로 이태원의 짝퉁 가방 가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소설 속 이태원은 만생이 진정성의 공간으로 느끼는 용산구 101-9번지와 대립되는, 소위 ‘짝퉁’으로 표상되는 공간이다. 용산구 한강로라는 세계에서 쫓겨난 만생은 이태원이라는 현실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단순한 일상의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 새로운 인물들과 함께 살아가며 자신의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만생은 이태원에서 다시 만난 첫사랑 오선과 그의 첫경험 상대 유진, 그리고 태화와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각자의 아픔과 슬픔을 헤쳐 나간다. 그러나 순탄치만은 않다. 만생이 좋아하던 오선은 태화에게 관심을 표하고, 만생은 그런 그들을 그저 지켜본다. 그 와중에 유진은 만생에게 관심을 갖는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덜어주기도, 더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강릉 앞바다에 보트를 띄워 수평선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다보면 어느 날 아메리카의 서쪽 해변에 당도할 것은 자명하다. 지구본만 보더라도 태평양은 고작 두 걸음만으로도 충분히 건널 수 이는 바다가 아니었던가.”

“엄마 난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없어도 아는 건 많은 놈이라니까.”

이태원 거리는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활기가 넘쳤다. 거리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이국적인 모자를 쓰고 있는 외국인, 교복을 입고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학생들, 길거리에서 케밥을 팔고 있는 유쾌한 터키인까지 갖가지 개성을 가진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기자는 은은하게 코를 자극하는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를 따라 이태원 거리를 따라 걸으며 이곳 어딘가에 있을 만생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문득 길을 걷고 있는 모두가 만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기자의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두가 각각의, 자신만의 아픔을 안고 꿋꿋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도 각자의 아픔을 딛고 성장하고 있는 중이겠지, 나 자신도 마찬가지일 테고.’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소설의 후반부 만생이 일하던 짝퉁가방 가게는 경찰에 적발되어 문을 닫게 되고, 오선은 ‘판 찡’을 따라 외국으로 떠난다. 태화 또한 자신의 성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는다. 그들의 짧았던 만남은 이내 다시 각자의 길을 향해, 각자의 문제를 안은 채 네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태화야 나 아파.”

“그래 알아. 하지만 죽을 만큼 아프진 않잖아.”

죽을만큼, 아프진 않으니까 내 아픔에 대한 값은 대략 오십만원쯤이거나 이십오만원 정도 되겠다. 누가 정확한 값을 매기는지는 알 수 없다.

 

만생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기자는 다시 기자의 삶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소설은 만생이 겪는 이성 관계, 외로움, 박탈감 등이 뚜렷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 끝났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소설은 명확하지 않은 시작과 불분명한 끝을 가졌기에, 소설은 우리의 삶과 닮아있는 듯 하다. 만생이 뚜렷한 근거 없이 언젠가 어른이 되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은 ‘언젠가 대학생이 되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언젠가 취업을 하게 되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기자의, 아니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듯 했다. 모양은 서로 다르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의 본질은 모두 비슷할 것이기에,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방황하고, 아파하지만 ‘죽을 만큼은 아프지 않아’라고 말하는 이 세상의 모든 태만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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