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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1933)

휘몰아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운현궁의 정취를 살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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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문희원 기자
일러스트레이션/문희원 기자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서울시 사적 제257호로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잠저(潛邸)이자 흥선대원 군의 사저이다. 현존하는 5개의 궁 중 임진왜란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궁으로, 고종이 탄생하고 왕위에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가례 행사 등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과거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했던 운현궁은 차츰 규모가 줄어들면서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 교육원, 일본문화원, 중앙문화센터, 운현초 등학교 등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정원만은 잘 보존되어 그 운치가 그대로 남아있으며 고종 시절부터 운현궁을 지켜온 거대한 노송(老松)이 수많은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운현궁의 봄』은 1933년 4월에서 1934년 2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소설가 김동인 (1900-1951)의 대표적인 장편 역사소설이다. 많은 이들은 조선 말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를 휘어잡던 왕실 종친의 이야기를 일제강점기 시절 일간 신문에 실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었으나 김동인은 『운현궁의 봄』이 문학 그 자체를 위한 소설임을 밝혀 자신의 소설이 문학 외 다른 목적을 가지는 것을 피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역사적 교훈 보다는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표현과 재미있는 서술 등을 중점으로 소설을 집필하였다. 대혼란의 시기에 등장해 기울어가는 조선에 등불이 되려 했던 흥선대원군의 파란만장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소설, 『운현궁의 봄』 을 따라 기자는 운현궁으로 향했다.

정월부터는 봄이라 하되 이름이 봄이지, 이월 중순까지도 날이 춥기가 여간이 아니었다. 그날 운현궁 안의 공기는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중략…) 문득, 안에서 곡성이 울려 나왔다.

 

입동이 지나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고 사람들이 저마다 옷깃을 여미고 다니기 시작했다. 기자는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운현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운현궁으로 향하는 길목 에는 노란 잎사귀들이 바닥으로 다 떨어져 나뭇가지만 휑하니 남은 은행나무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생명을 다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겨울나무의 잎사귀들처럼 소설은 주인공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나는 어느 겨울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도 결국 죽음이라는 허무한 결말로 마무리됨을 먼저 보여주고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 그의 일생을 조망한 것이다.

상갓집 개라! 이 상갓집 개는 내일도 또한 병기의 집을 찾아보자. 수모를 무엇을 탓할 것인가? 한때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다. 먼 장래를 위하여 온갖 수모를 참고 온갖 고난을 참자.

 

은행나무길을 한참 걸어 코가 빨개질 때쯤 기자는 운현궁 문 앞에 도착했다. 외관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충분히 기품 있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운현궁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큰 느티나무가 우뚝 서서 기자를 반겼다. 고종의 탄생부터 흥선대원군의 일생을 지켜 보았을 이 거대한 나무는 거친 세월을 묵묵히 견디고 운현궁을 지키고 있었다. 이야기는 다시 흥선대원군의 젊은 시절로 흘러간다. ‘상갓집 개’라는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에도 파락호 행세를 멈추지 않고 보잘것없는 우스운 사람으로 살아갔던 그는 정권의 주축 세력이자 조선을 쥐고 흔들었던 김씨 가문의 권세에 온갖 천대와 멸시를 당한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겉으로는 업신여김을 감 수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 원대한 야심을 품고 권세가에게 빼앗긴 힘없는 조선을 되찾겠노라 다짐한다.

 

순조의 뒤를 이어 여덟 살 때 등극하였던 세손 헌종이 기유유월 초엿샛날, 보수 스물 셋으로 후사 없이 승하하였다. 종친 가운데서 지존을 모셔오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선왕이 후사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흥선군은 그동안 갈아온 칼을 꺼내 들 기회를 갖게 된다. 결국 그는 그의 어린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하고, 자신은 대원군의 지위에 오른다. 하룻밤 사이에 흥선대원군이 숨겨진 본색을 드러내며 섭정의 자리에 올라 부정부패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자 권세가들은 꼼짝없이 그들이 저지른 무수한 횡포에 대한 처벌을 받게된다. 느티나무 앞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고 있었다. 평일 낮 시간인지라 이곳을 찾은 이들은 많지 않았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대부분 외국인 관광객들이었고 그마저도 조금 구경을 하다가 곧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지만 기자가 마주했던 운현궁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고 그래서 더욱 쓸쓸했다. 사립문을 지나 노안당에 들어섰다. 정(丁)자 형태의 모습을 하고있는 노안당은 논어에서 따온 이름으로 ‘노인들을 편안하게 한다(老者安之)’ 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은 국정을 논하고 외부손님을 맞아들이기도 했다.

흥선의 집을 운현궁이라 하였는데 이제 운현궁은 정치의 중심지이며 이 나라의 중심지가 되었다. 드디어 오랫동안 쓸쓸하기 짝 이 없던 이 집에 봄이 찾아온 것이다.

운현궁에 찾아온 ‘봄’은 결국, 추운 겨울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더욱 싸늘하고 매서운 봄날의 추위를 나타내기도 하며, 스러져 가는 왕조의 끝자락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던 봄날 같았던 한 인물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소설은 흥선대원군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을 통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 탐욕에 가득 찬 세도가문들에 의해 나라의 기반이 흔들리던 조선 후기의 암울하고 어지러운 시대를 총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우리는 소설 속에서 세도정치로 인해 부패한 사회상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기울 어져만 가던 조선을 흥선대원군이 재건한다는 소설 속 설정은 사실 뻔한 영웅 신화적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늘날 이 소설은 지나치게 흥선대원군의 영웅적 일대기를 그려내고 있다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동인은 ‘역사’보다는 ‘소설’에 방점을 찍으면서, 역사에 관심이 없고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조선 말(末) 시대의 실정을 잘 보여주었다. 올 겨울 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을 읽고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조선의 마지막 역사의 체취를 찾아가 직접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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