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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김연경 역, 민음사, 2012

<언어학의 이해> 김남미 교수가 추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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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강생들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을 즐긴다. ‘사람을 죽이면 왜 안되는 거죠?’, ‘자유는 정말 소중한 것일까요?’ 수업 중 이런 질문들을 받은 학생들은 적잖이 당황한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수강 포기를 선택하는 모양이다. 내가 이런 질문들을 전하려 애쓰는 이유는 젊은 날 스승이 준 과제와 그 과제를 풀기 위해 고민했던 경험을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은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자네, 요새 무슨 책을 읽는가?’,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 러시아 작가의 큰 축은 도스토옙스키 아닌가?’ 이 말이 나를 ‘도스토옙스키’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학기 내내 도스토옙스키에 미쳐 있었다. 1987년 그 험한 시기에 무엇이 그렇게 도스토옙스키에 집중하게 하였을까? 그 이후 도스토옙스키를 진지하게 다시 들여다본 적이 없기에 그 경험의 실체가 다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책을 다시 펴들지 않아도 그 어린 시절 고민의 내용들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질문들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이 (蝨)와 같은 존재를 죽임으로써 러시아 발전에 기여할 젊은이들의 교육 기반이 마련된다면 그 살인은 정당한 것이 아닌가?’, ‘이 세상을 이끌도록 의무 지워진 사람들에게 살인이란 용인된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당시 나의 반론 근거들은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니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리는 그렇지 않다고 저항하고 싶은 나의 입을 끊임없이 틀어막았다. 나는 한 학기 내내 라스콜리니코프의 질문을 뇌까렸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반론 할 수 있어야 내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고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최초로 내가 안다고 착각하는 많은 것들이 단지 교육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답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무엇이 올바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스스로 그 가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배워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고민의 날들이 내용이 달라진 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일어났다. 그리고 그 고민의 날들은 여전히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나는 나를 지탱하는 그 고민의 힘들을 학생들에게도 전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질문들을 하고 학생들의 응답을 기다린다. 당연히 학생들이 도스토옙스키를 읽기를 바라는 마음도 전달되었으리라. 얼마 전 교정에서 학생 하나를 만났다. 반갑게 인사하던 그가 문득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도대체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수가 없어요’ 나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이 훌륭한 학생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수 없다는 고백에 놀랐고 그것이 내게 사과할 점인지에 대해 놀랐다. 둘 중 어떤 것인지에 대한 단서 없이 물었다. ‘왜?’ ‘한 사람을 부르는 이름이 너무 많아요. 누가 누군지를 파악하는 데만도 너무 시간이 걸려요’ 사과하여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나는 어린 시절의 감동이 그대로 학생들에게 전달되기를 고집해 온 것이었다. 자신이 만나는 세계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자신이 만나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가치를 만드는 과정, 그 과정이 중요함을 알게 해 준 것이 라스콜리니코프였다. 그 경험의 통로가 굳이 죄와 벌이라는 소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이미 그 친구는 내 황당해 보이는 내 질문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깊은 고민을 한 후 그 결과를 글로 써 나를 감동하게 하질 않았나. 길은 하나가 아니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어린 친구 덕분에 도스토옙스키로 가는 다른 길 하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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