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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억, <작품>(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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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억, <작품>, 1968, 캔버스에 유채, 68x72.7cm, 소장번호 1043
김창억, <작품>, 1968, 캔버스에 유채, 68x72.7cm, 소장번호 1043

김창억이 본교 교수로 부임한 이후에 제작한 <작품>(1968)은 현재 박물관 상설전 《홍익 모던 앤 컨템포러리》 전에서 볼 수 있다. 화면의 대부분을 짙은 초록색이 휘감고 있고 화면 중앙에는 굵은 곡선으로 표현된 분할된 물고기 형상이 자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칠해져있지만 화면 상단과 하단에 물감을 흘리는 기법이 보이고, 좌우에 있는 작은 원은 강한 마티에르가 느껴진다. 

  김창억은 경성제2고보 재학시기에 미술교사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로부터 미술을 배웠다. 사토는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장미회 등 전위미술을 추구한 작가이자 인품이 훌륭한 교육자였다. 사토로부터의 교육은 한국근현대미술에 적지 않는 흔적을 남겼는데, 김창억을 비롯하여 본교 교수를 역임했던 이대원, 임완규, 유영국 그리고 이화여대에서 재직했던 권옥연 등이 사토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1961년부터 2·9회를 결성하여 스승을 기념하는 동인활동을 하기도 했다. 김창억은 스승인 사토 구니오와 같은 경향의 작가들이 교수로 부임해 있던 동경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1943년 졸업했다. 

  해방기에도 김창억은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일본에서 진보적 인사들이 발간하던 어린이 잡지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고, 1948년 일본 신흥미술협회전에 참여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전문학교인 경주예술학교에서 회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김만술, 이응로, 김영기, 박봉수, 김준식 등과 함께 활동한 경주 시기에 동경에서 열린 《피카소》 전 이후 급속하게 확장되던 화면분할 기법을 접목하기 시작했다. 현재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1957년 첼로켜는 여성 초상화는 날카로운 사선과 직선으로 화면을 분할하는 기법을 보여주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경기여자고등학교에 이어서 본교에 부임한 시기부터는 이전의 날카로운 사선과 직선에 새롭게 곡선을 추가하고, 그리고 이전의 바퀴 등의 기계적인 소재에서 벗어나 물고기와 나무 같은 유기체로 점차 나아가면서 후기에 선보인 그의 화풍을 완성해 간다. 

  현재 박물관 상설전에 출품된 김창억의 <작품>은 1960년대 중반 이후의 그의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이다. 미술사적 의의가 매우 높은 이 작품을 통해서 1958년 갑작스런 유입으로 시작된 앵포르멜 미술이 아닌 1950년대 중반부터 본교 교수진이었던 한묵, 김창억 등 중견작가들이 꾸준히 실험한 면 분할을 중심의 추상미술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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