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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2015), 구원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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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당시부터 화제를 일으켰고 이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영화를 3년 만에 다시 꺼내 봤다. 이 영화는 감독인 조지밀러가 젊은 시절 제작했던 3부작을 바탕으로 탄생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토리와 연출 등 많은 부분이 발전했지만 ,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이브 엔슬러에게 조언을 받았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영화전체에 녹아들어 있는 페미니즘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글에선 다른 요소를 배제하고, 영화 속의 ‘여성’에 대해서만 다뤄보려고 한다.

 

재화가 된 여성들 

처음 영화가 시작되면서 남성 주인공인 맥스가 등장한다. 그 뒤를 워보이들이 따르고, 몇 개의 장면들이 지나가고 나면처음 등장한 여성은 가슴에 유축기를 달고 강제로 젖을 생산하고 있다. 물이 부족해진 세상에서 여성들은 ‘어머니의 우유’를 생산하는 기계가 된 것이다. 재화가 된 건 이들뿐만이 아니다. 임모탄의 여자 즉 아기를 낳을 여자들로 분류되는 여성들 또한 재화로서 취급받으며, 이들을 데리고 탈출하는 영웅 퓨리오사로부터 영화의 서사가 시작된다. 영화 내내 이들은 남성들에게서 자신의 이름보단‘물건’으로 호명되지만, 그 호칭만큼 수동적인 인간상을 보여주진 않는다. 임모탄의 방을 스스로 탈출해 자신과 배속의 아이를 인질로 아군을 보호하거나 총을 장전하기도 하며, 적의 동태를 살피고 때때로 대담하게 적을 속이기까지 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과 의지를 보인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스플랜디드가 사망해 패닉에 빠진 프래자일이 임모탄에게 되돌아가려 하자 다른 이들이 그를 막으며 우리는 물건이 아니라고 소리치는 장면은 이들이 아기를 낳는 인형이 아닌, 그 이상의 가치와 자아를 지닌 개인들임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기존의 ‘여성 영웅’은 가라 

이 영화의 진행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자 구원을 위해 투쟁하는 영웅 퓨리오사는 3년 전 개봉 당시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도, 짙은 아이라인도, 몸이 다 드러나는 의상도 무엇 하나 걸치지 않고 기존의 ‘섹시하고 강인한 여성 영웅’을 온몸으로 부정했다. 오히려 그런 정형화된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걸리적거리는 머리카락을 밀고, 얼굴엔 기름칠을 하고, 군더더기없이 활동이 편한 옷을 입고 싸운다. 만약 그가 성별만 여자인 마초를 표방하는 캐릭터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옳지 않다. 그는 남성을 흉내 내지도, 강해 보이기 위해 쓸데없이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남발하지도 않는다. 그저 전사로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뿐 남성과는 다르다. 또한, 그의 고정관념 타파는 겉모습에서 멈추지않는다. 다른 영화라면 으레 있었을 법한 남자 주인공과의 사랑이나, 강하지만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만은 약해지는 순종적인 여성성 클리셰 따위는 없다. 그는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슬픔과 좌절 또한 오롯이 홀로 감내한다. 또한, 맥스가 떠나는 순간에도 고개만 끄덕일 뿐, 마지막까지 둘 사이엔 동료로서의 담담함만이 남아 일관성이 유지된다.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남은 것은 맥스와의 사랑이 아닌 풍요로운 땅에서의 새로운 시작이다. 관객을 똑바로 응시하며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지도자의 카리스마만이 남아 잔상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녹색 땅은 없었다.

이 영화의 상영시간 중 약 2/3를 차지하며 여정과 희 망을 상징하는 녹색 땅은 주인공이 도착한 뒤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진다. 이미 오래전 까마귀 떼의 서식지가 되어버린 녹색 땅엔 황량함만 감돌았고, 그곳에서 도망친 ‘어머니들’은 그 수도 얼마 남지 않은 채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된 퓨리오사는 절망했지만, 다시 소금사막을 건너 정착지를 찾아 떠나려 한다. 하지만 맥스의 설득과 그 계획의 실현 가능성 때문에 풍부한 자원과 비옥한 땅이 있는 시타델로 돌아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임모탄을 제거하고 새로운 시타델의 리더가 된다. 시타델에서 벗어났지만 결국 그곳을 떠나지 못한 결말에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한 유명한 문장이 떠올랐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도 결국 그것이 아닐까. 어디에도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낙원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발 디디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모든 이들이 도피 대신 도전을 택하고 용기 있는 발걸음을 행할 때, 세상이 조금 더 살 만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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