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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부터 현 실정까지, 설 곳 잃은 예술가들의 현주소

미지의 세계에서 예술가로 살아남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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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문화·예술과 밀접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어딜 가도 영화관, 미술관, 박물관이 존재하고 일명 ‘교양’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미술작품을 보는 안목은 필수적이며, 적어도 아주 유명한 화가 이름 몇몇은 기본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한국 사회의 예술이 차지하는 입지의 단면일 뿐이다. 물리적으로 현대인과 예술은 가깝지만, 19세기 이전 예술이 상위층의 전유물이었던 것처럼 여전히 예술과 사람들 사이의 장벽은 완벽히 허물어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순수예술이 그러한데, 현대 미술이 시작된 이후 오로지 ‘순수’하게 한 분야의 미술을 하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다. 즉 작가, 예술가들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데, 특히 순수예술의 가장 대표적인 회화, 조소 등도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추어 변화를 꾀하고 있다. 단 한 가지의 매체와 형식을 가진 작가보다 영상, 회화, 조각, 설치, 행위예술, 공예, 개념미술 등 다양한 형식이 혼재된 예술이 등장한 것이다. 더 이상 누가 더 똑같이 잘 그리거나 조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개념, 의미, 컨셉(Concept)의 중요성이 커지며 각 분야들이 가졌던 고유의 특성과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렇듯 예술이 각 분야별로 명확한 색깔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이고 철학적으로 합쳐져 모습을 드러내자 대중과 예술 간의 괴리감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예술은 아름다운 회화 작품이며 누가 보아도 평범한 사람은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존재했었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어 남성 소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두고 이를 예술작품이라고 부르고, 커다란 캔버스에 점 하나를 찍고 위대한 걸작이라고 부르는 등 개념적인 미술이 표면적으로 아름다웠던 미술을 압도하자 미술계의 현실은 달라졌다. 이전의 미술작품은 분명 사진보다도 정확히 누군가를 따라 그리는 기술이 필요했고 누가 보아도 탄식을 지를 만큼 ‘잘’ 그렸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미술계에는 단순히 잘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매체와 분야를 접목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미술을 접한 비전공자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나도 그리겠다, 이게 미술인가?’ 등의 반응을 보였다. 이렇듯 대중과 작품 사이의 소통이 단절되고 더 이상 예술에 친근하게 다가가기 어려워졌다.

여기서 문제점이 발생한다. 순수예술에 대한 엇갈리는 반응으로 인해 예술가들의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작품 전시는 누구의 눈에 맞추어야 하는가? 사회 속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렇듯 예술계 내에서도 변동이 심한 지금, 특히 순수 예술의 기반은 점차 사라지고 그들의 역할은 희미해지고 있다. 문화의 중요성을 알고 이에 대한 산업을 늘리려는 국가적인 차원의 움직임은 여전하다. 그러나 예술가들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들의 상황을 세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만의 리그’로 바라보는 실정 탓에 지원과 관심이 미비하다. 거대해지는 규모, 치열해지는 예술가들의 경쟁, 설 곳 없는 예술가, 멀어지는 대중들. 예술가가 서야 할 곳은 어디인가.

 

작가들의 미술계 ‘생존’, 그 내부의 실체란

‘이것도 미술이냐’, ‘이해 못 하겠다’라는 외부인들의 평가절하가 아무리 옆구리를 찔러대도 꿈쩍 않는 이들이 예술가들이다. 과거부터 한국 사회 내 순수예술의 대중적 영향력은 이미 실추된 지 오래다. 하지만 해당 문제의 해결은 당사자인 미술작가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고 있는 당대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으며, 그들만의 세계에서 치열하게 작업을 이어나갈 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무관심 속에서도 그들은 생존을 위해 치열해야만 하는가.

▲여유롭고 평화로운 예술세계?

이제 ‘잘’ 그렸다는 표현은 미술계 내에서 뚱딴지같은 소리가 되었다. 현대에 와서 미술의 표현 매체와 기법, 주제 등 작품의 구성요소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해졌다. 이에 따라 미술가와 미술작품의 인정범위는 모호해지고 있는 반면 작품의 명분과 주제에 대한 명시는 굉장히 중요해졌다. 이러한 미술계의 현 경향은 비(非)전공자들에게 있어 미술작품의 ‘가독성’을 더욱 떨어뜨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과연 미술은 사회에 녹아들어 다수의 관객들과 소통하고 공유될 수 있을까.

“작품을 만드세요. 계속 만드세요. 그리고 사랑하세요. 그리고 증오하세요. 그래도 계속 만드세요.” 끊임없는 작업 활동을 부추기는 듯한 어느 뉴욕 미술가의 이 잔소리는, 마치 작가로서의 예술적 잣대 유지에 대한 격언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작가들이 미술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방법적 충고로 여겨질 수 있다. 혹자는 미술계를 ‘사람이 죽지 않는 전쟁터’라고 표현한다. 미술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안의 치열한 경쟁과 어려움에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재정적인 어려움, 작업의 꾸준한 유지, 막연한 미술시장 진입 등은 이미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고전적인 과제’처럼 여겨진다.

 

“배우나 가수와 달리, 미술가에게는 소속사도 매니저도 없다. 전속 갤러리를 구하기 전까지는 혼자서 전부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사무적인 일부터 법적인 일까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경력이 엉망이 되고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헤더 다시 반다리, 조나단 멜버, 김세은 역,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예술가 생존법 Art/Work』, 미진사, 2015.)

 

‘예술가들은 인간 내면의 깊은 욕망과 철학을 표현한다’, ‘예술가라면 재정적, 속세적인 문제들에 얽매이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한다’. 비전공자들에게 있어 예술계에 대한 이질감을 강화시켰을지도 모를 이 신화 같은 이야기들은, 오히려 미술시장에 내뱉는 반어적인 조롱처럼 들린다. 이미 미술계에 커다란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거장’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작가들은 대외적 자기 홍보에 심열을 기울여야 한다. 자기 홍보라 함은, 작품의 문서업무와 이미지 제작, 오픈 스튜디오 개최, 보도자료 스크랩, 명함과 웹사이트 관리, 작가 포트폴리오 제작 및 자료 제출까지. 깔끔하게 쓰인 제안서와 똑 부러진 작품 설명 능력은 이제 작가들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작가들은 홍보, 지원, 계약 등의 대외 업무들에 자신의 작업시간 못지않게 시간과 노력을 들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전시지원 공모는 치열한 경쟁률 속에서 수많은 지원자들을 탈락시킬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또한 갤러리나 재단과의 기적 같은 계약 성사가 이뤄진 뒤에도 그들은 지원금, 작품 전시, 계약, 저작권 등록 등, 미술계의 복잡 난해한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작업을 조율하게 된다.

 

▲작가들 위 혹은 아래, 혹은 뒤에 있는 그들

미술계 및 미술시장에서 무대 밖으로 얼굴을 내비치며 미술계를 대표하는 것은 분명 작가와 그들의 작품들이다. 반면 미술계 작가들의 실제적 입지는 마치 겉으로 보이는 빙산의 일각과 같다. 이들의 미술계 생존에 있어, 물론 작가 개인의 끊임없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수많은 작가들 중 누구를 수면 위로 돋보이게 할 것이며 누군가를 물 아래로 감춰버릴지의 여부는, 미술계 내부의 복잡한 역할들과 이해관계 속에서 좌우된다. 미술계에는 미술관이나 각종 재단 외에도, 갤러리와 화랑, 경매 회사, 큐레이터, 감정사, 진위 위원회 등 다양하게 세분화된 역할들과 입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다양하고 복잡한 미술시장에 대해 김민애 작가는 “최근 한국 미술계의 전문가들은 아트 딜러, 갤러리스트, 미술 비평가, 독립 큐레이터 등으로 이전보다 더욱 세분화되고 있는 것 같다.”라며 “특히 큐레이터나 비평가들의 역할이 두드러지며 이들은 ‘작가’라는 역할과 교집합을 형성해 새로운 직업 모델을 제시하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기획자형 작가 혹은 ‘큐레이터 쉽(Curatorship)’이 돋보이는 기획자, 비평의 프레임을 살펴보는 ‘메타-비평가’ 등 새로운 형태의 전문가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술계 내부의 역할들은 세세히 배분되어있는 실정이지만, 미술시장의 입지 배분은 이와 같이 고르지 않다. 2017년 ‘미술시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상위 3개의 화랑이 미술품 판매 전체 매출의 52.6%를, 상위 2개의 경매 회사가 81.8%를 차지했다. 심지어 해당 3대의 갤러리와 경매사 2대의 1년 매출액은, 국립현대미술관(MMCA)과 정부의 ‘시각미술’ 분야 예산의 3배에 다다른다. 이는 현재 한국의 미술시장이 쏠림 및 편중 현상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소수의 화랑, 경매사들이 일종의 ‘대주주’로서 미술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이 과도한 집중화는 필연적으로 ‘소수 작가 편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들의 독과점은 곧 소수 작가들의 독과점으로 이어져, 결론적으로는 수많은 작가들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응해, 한국화랑협회에서는 ‘화랑-경매업 겸업 금지’의 입법화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자사 경매 참여 금지’ 등의 제도적 장치로도 이에 대한 대응은 충분하며, 계속하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로서 겸업 금지를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일각에서는 한국 시장 내 컬렉터들의 매매 경향에도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컬렉터들이 자신의 안목에 따라 작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소위 ‘귀로 보고 산다’라는 것이다. 큐레이터 혹은 갤러리 측에서의 권유 및 그들 간에 서로 작용하는 ‘눈치’들로 인해, 또다시 소수 정예 작가들의 독점적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것이다.

 

침체된 한국 미술시장, ‘독점이라도 감사해요’

복잡하게 세분화된 역할들과 시스템을 보면 활발하게 흘러갈 법한 미술계지만, 이들의 실상은 그저 침체된 시장일 뿐이다. 과거 2000년 전후 경제적 위기와 함께, 정부 정책은 문화예술 영역을 경제발전의 중요한 매개체로서 이끌어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문화산업의 중요성이 인정되었고, 그를 매개로 한 서울, 광주, 부산, 각 주요 도시의 비엔날레들이 개최되어 지역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일시적인 부흥 이후, 한국 미술시장의 침체기는 땅을 뚫고 지속되고 있다. 과거에는 미술가 조합과 같은 ‘대안공간’ 등의 공생 공간이 구성되기도 했으며, 작가들은 미술계 내부 ‘기득권’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반면 이제는 오직 미술계 내에 살아남아 생존하는 것 자체가 관건이 되었다. 우선 한국 시장의 컬렉터들은 그 수가 현저히 적다. 꽁꽁 얼어붙은 경기 속에서 미술계 작품의 거래 및 유통이 활발하게 유지될 리 없다. 몇몇 소규모 화랑들은 우후죽순 문을 닫기도 했으며, 사실상 미술계를 독점한다고 하는 소수의 화랑들조차 큰맘 먹고 작품들을 거두어들이는 실정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오히려 독점하는 화랑들이라도 맥을 유지해주어 고마울 정도이다.”라는 목소리까지도 나오고 있다. 세계적인 미술계에 있어서도 한국 미술계가 인정받는 질적 측면은 아직 정

체된 상태이다. 각종 비엔날레 및 국제 미술행사들은 분명 해외 미술계에 대한 한국 내 담론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한국 미술계와 서양 미술계의 교류 기회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또한 해외로의 유학조차도 더 이상 필요조건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이는 유학생으로서 외국에서 활발한 연구를 이어나가며 ‘스펙’을 쌓는 와중에도, 국내에서 작가로서 활동하지 못하는 기간 동안 그들은 한국에서 잊혀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작가들은 한국에서 ‘슈퍼스타’가 되어도 외국 시장에서는 무관한 인물로 남기도 하며, 반대로 국내에서는 전혀 인지도가 없지만 해외에서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는 작가들도 있다.

이외에도 국내에서는 지난해 이우환, 천경자 작가 등의 위작 논란과 조영남 작가의 대작 논란,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대통령 탄핵과 같은 사건들이 다사다난하게 이어졌다. 이에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 있어 국가적 문화 정책은 핵심 영역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現) 정부는 지난 정부에서 수립한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안)(2014-2018)’을 갱신하며, 지난 2월 7일(수)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안)(2018-2022)’ 공청회를 개최했다. 창작자 보수 제도부터 미술품 유통 기반 확립, 세제 개선,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까지. 정부는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을 위한 야심을 드러내며 제도와 법안을 통한 개선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미술계에서는 정부의 이러한 대처에 대해, ‘정책적인 해결보다는 사회 분위기적 측면에서 미술시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우선적 과제’라는 공통된 의견을 보인다. 또한, 한 한국예술단체의 회장은 “미술계 진흥을 위한 토론회 등 행사에서 한국 미술계의 의견을 들으려면 각계각층의 원로, 중견, 신진, 작가 지망생들을 고루 불러 의견청취를 해야 하는데, 정책토론회에서는 작가들을 찾기 힘들었다.”라고 밝혔다. 만일 이처럼 미술계 문제 해결을 위한 법안들이 현장의 논의와 격리된 채 진행된다면, 해당 정책은 그저 공회전하게 될 것이다.

 

“위작이 적건 많건, 미술 생태계의 다양성을 불어넣는 대다수의 작가에게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슈퍼스타의 위작은 슈퍼스타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신진작가들은 비평과 시장도 아닌 기금을 중심으로 한 기생 경제 안에서 비정상적인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술계 내부의 선순환이 사라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각개전투가 지속된다는 점, 이것이 한국 미술계의 진짜 문제다.”

(▲백지홍 편집장, 『미술세계(美術世界)』2018년도 1월 호.)

 

이제 미술계에서 자본주의적 상품화 논리는 당연시 여겨진다. 대외적인 외부의 인정과 찬사는 사실 그들의 예술작품에 있어서는 선택적인 요소지만, 현실적인 작업 지속에 있어 이는 필수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낚아채 실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작가들은 ‘썩은 동아줄’과 같은 자본을 꼭 붙든 채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김나은 기자(smiles3124@mail.hongik.ac.kr)

홍준영 기자(mgs05038@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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