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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 70년문학은 4·3을 어떻게 기억하고 말하는가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광복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소련과 미국 간의 패권 장악을 위한 정치적 요충지로 자리 잡으며,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소련과 미국은 38선을 경계로 한국을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한다. 이에 좌, 우를 막론하고 남북 인사들은 분할 통치를 반대하며, 자주 독립을 외쳤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 투표를 주장한다. 1948년 4월 3일, 남조선노동당 제주도위원회는 5.10 남한 단독 정부 선거 반대를 외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경찰과 서북청년단(이하 서청)은 이를 반대하는 세력을 불순분자로 규정하며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후 4·3 무장봉기를 진압한다는 명목 아래 제주도민에 대한 학살을 자행한다. 이 과정에서 무장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도민과 어린아이들까지도 불순세력으로 간주되어 희생된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4·3 사건을 좌익세력의 반란 사태로 규정하며, 단순 해프닝으로 무마했다. 이후 1970년~80년 군부독재 아래에서도 4·3 사건에 대한 언급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는 이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 가운데 1978년 『순이 삼촌』이 발표된다. 이전까지 4·3 사건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은 없었다. 작가는 1941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현기영이었다. 그는 4·3 사건이 어떠했는지 잘 알고 있었고, 진실을 말하고자 했다. 실제 부촌리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주인공 ‘나’의 주변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 그 날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러나 작품에서도 그 날은 쉽사리 꺼내기 어려운 사건으로 묘사된다. 그 날 군인들은 주민들을 운동장으로 불러 모은다. 임무를 빌미로 도민들의 집을 모두 소각하고, 이들을 군인 직계가족을 기준으로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직계가족이 아닌 이들을 불손세력으로 정해 무참히 학살한다. 순이 삼촌은 그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런 그가 30년 뒤 밤색 두루마기 옷을 입은 채, 도로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나는 순이 삼촌이 이미 30년 전에 죽었음을 알았다. 30년 전 이미 모든 가족을 잃은 그에게 사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4·3 사건의 비극을 말한다. 그 날은 생존자와 희생자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것이다. 작품 발표 후 작가는 보안사(現 국군기무사령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다. 저작 역시 판매 금지를 당했으며, 이로 인해 작가는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이는 당시 정부가 4·3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980년대 중반 군부독재 타도를 위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며 4·3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도 같이 이뤄진다. 

 

  문학계에서도 『순이 삼촌』 이후 1987년 이산하가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하며, 4·3 사건의 진상을 말한다. 총 125페이지 분량의 시는 4·3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왜 제주도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는지를 말한다. 또, 군인들이 이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는 모습과, 제주도민들이 한라산에 올라가 투쟁하는 모습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시인은 4월 3일 토요일 밤 2시, 제주도민들이 조국통일과 민족해방을 외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군인들의 잔인한 탄압을 피해 제주도민은 생존을 위해 또 부정에 맞서기 위해 한라산으로 올라간다. 이 비극은 6.25 전쟁이 끝난 1954년 9월 21일 종결된다. 그 동안 당시 제주도민의 10%인 약 2만 5천명에서 3만 명이 희생됐다. 이후에도 연좌제로 인해 희생자들의 유가족은 감시를 받아 왔으며, 정부의 어떠한 사과도 받지 못했다. 1980년 민주화운동이 한창인 시기를 감안했을 때, 「한라산」은 『순이 삼촌』보다 더 적나라하고 강렬하게 4·3 사건을 서술한다. 실제 시 내용은 작품 발간 후 시인이 구속당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저자 후기에서 시인은 당시 자신이 “남한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 사회로 규정하고 무장폭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도민항쟁으로 미화하며, 인공기를 찬양하는 등 북한 공산 집단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음을 밝혔다. 그럼에도 「한라산」을 통해 대중들은 드디어 4·3 사건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은 제주도민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얼마만큼 비윤리적인 행동이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서사시를 통해 4·3 사건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생존자들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잊지 못한다. 자식을 잃은 슬픔, 남편과 부인을 잃은 슬픔. 이들은 단지 불순분자라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민주정부가 들어서며 정부는 4·3 사건에 대한 역사적 비극을 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표하며 4·3 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하였다. 또 2014년 박근혜 정부는 4·3 사건을 국가추념일로 제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은 4·3 사건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정부 및 각종 언론에서는 4·3 사건을 재조명하며, 다시는 이런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간은 일방향이다. 지난 일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4·3 사건을 이해하고, 이러한 비극이 재발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역할이자 책임이다.

 

김민우 기자  (kimsioa@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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