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12장. 강북의 도로는 왜 구불구불한가: 포도주 같은 건축(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층층이 퇴적된 삶의 역사

팰럼시스트(Palimpsest)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원래 양피지위에 글자가 여러 겹 겹쳐서 보이는 것을 말한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양피지에 글을 쓰던 시절에는 귀한 양피지를 재활용하기 위해서 이미 써진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글자를 써서 이전에 써진 글자들 위로 새로이 쓴 글자가 중첩되어 보이는 일이 흔했다. 이런 뜻의 단어가 건축에서는 오래된 역사적 흔적이 현재의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은유적으로 설명할 때 사용되고 있다. 가장 손쉬운 예로 강북의 복잡한 도로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도시에는 상하수도 시설이 부재하였다. 하지만 상하수도 시설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요건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런 인프라가 구축되기 전에 조선시대 때 주거들은 한강의 지류하천을 따라서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실개천 주변으로 주거들이 들어서게 되고 그 옆으로 사람과 말들이 지나다니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도로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 시대의 도시는 수변공간 주변으로 빨래도 하고 상하수도 시설로 사용하는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하천의 위생적 문제가 심각해지고 동시에 자동차도로의 확보가 도시형성에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으로 부각되면서 하천부지는 거의 대부분 복개되어 도로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강북의 도로망은 많은 부분이 구불구불한 자연하천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대형 간선도로가 들어서게 되면서 과거 하천중심으로 커뮤니티의 중심권이 형성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도로가 기존 커뮤니티를 나누는 문제가 대두되어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과거의 기술적 한계와 오랜 시간의 역사가 현재 우리가 사는 공간을 규정하고 영향을 미치게 됨을 알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도시 중에 하나인 로마는 팰럼시스트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로마는 과거 인구가 백만 명에 이르다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면서 완전히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로마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타이버 강의 범람에 의해 6미터가량의 퇴적층이 형성되어 과거 유적들이 덮였고, 이후 꾸준히 인구가 늘자 점차 고대 로마의 도시흔적이 다른 종류의 도시공간으로 전이된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과거 전차경주장 이었던 곳이 퇴적된 흙으로 덮여 없어지고 그 모양만 남아 지금의 나보나 광장이 된 곳이다. 실제로 필자가 나보나 광장의 뒷골목 어느 식당에 갔을 때 식사를 하던 위치가 과거 전차경기장에서 어느 좌석쯤 된 곳인가를 알려주는 안내지를 본 적이 있다. 전차경기장은 없어지고 르네상스 시대에 베르니니에 의해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광장으로 바뀌었지만, 말굽 모양처럼 생긴 특이한 나보나 광장의 형태는 과거 로마시대의 전차경기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럽의 도시들은 로마시대 때 만들어진 도시와 중세시대 때 만들어진 도시로 나누어지는데,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듯이 과거 로마의 도시에는 대부분 검투사 경기를 위한 콜로세움이 있었다. 이후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 주민들이 당시로서도 귀한 건축 재료였던 돌을 얻기 위해 콜로세움의 돌을 뜯어내었으나, 돌이 무거운 관계로 멀리 가지 않고 콜로세움 주변에 건물을 지어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콜로세움이 있던 자리는 텅 비고 주변으로 건물이 들어서서 달걀모양 광장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콜로세움을 집합주거로 변형시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역사가 깊은 도시들은 마치 여러 장의 트레이싱페이퍼 그림들이 쌓여있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도시 디자인은 쌓여있는 여러 장의 트레이싱페이퍼 그림들을 한 장씩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어느 부분은 지우고 어느 부분은 살리면서 상호관계를 조절해 오늘의 이야기를 하는 그림을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500년이 더 된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 역시 여러 시대에 걸쳐서 많은 이야기의 층들이 쌓여진 도시이다. 이를 잘 이용하는 건축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소주·포도주의 건축학

우리가 흔히 건축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벽돌을 쌓아 집을 짓고, 도로를 깔고, 지붕을 만들고, 창문을 만드는 일들을 상상한다. 과연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만이 건축의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가시적 현상 너머로 잠시만 살펴본다면 앞서 말한 건축행위들은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삶을 디자인하기 위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연극을 할 때 우리는 먼저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무대디자이너는 그 스토리에 맞추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최소한의 공간과 재료로 최적의 무대세트를 디자인한다. 건축도 마찬가지이다. 건축가는 먼저 사람의 행위를 디자인해야한다. 이것은 마치 작가가 시나리오를 먼저 쓰는 것과도 같다. 연극 시나리오 없이 무대세트가 디자인 될 수 없듯이, 건축가는 사회와 삶의 모습을 그리는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에는 건축물을 디자인해서는 안 된다. 건축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성전조차도 결국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장소이지, 하나님이 집이 없는 분이라서 지은 것이 아니다. 절이나 다른 종교건축물들 역시 인간의 행위를 위한 장소를 제공하는 건물이다. 인간이 어떠한 행위를 할 때, 그 행위에 걸맞는 환경을 연출해 주기 위해서 건축은 무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연극의 스토리는 빈약한데 무대장치만 블록버스터 급으로 해놓으면 안되듯, 너무 부족해도 안 되지만 너무 과해도 안 되는 것이 건축이다.

  좋은 건축은 소주가 아니라 포도주와 같다. 소주는 공장에서 화학공식에 따라 대량생산되는 술이다. 소주는 생산하는 사람이나 지역의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반영되지 않고, 인간과 격리된 가치를 가지는 술이다. 건축에 비유한다면 찍어내듯이 양산되는 아파트나 지역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국제주의 양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포도주는 좋은 건축 같다. 같은 종자의 포도라도 생산되는 땅의 토양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생산되고, 같은 종자의 포도와 같은 밭이라고 하더라도 그 해의 기후에 의해서 다른 포도가 만들어지며, 똑같은 재료라 하더라도 술을 담그는 사람에 의해 다른 맛이 만들어지는 것이 포도주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어 세상에 단 한 종류밖에 없는 포도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건축도 이 같이 지구상 단 하나밖에 없는 땅 위에 특별하게 주어진 프로그램에 특정한 건축가가 개입하여 단 하나의 디자인이 나와야한다. 지금처럼 지역성과 건축가가 배재된 상태에서 TV광고로 포장된 건설사의 아파트 브랜드로는 좋은 건축이 만들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떠한 것이 포도주 같은 건축일까?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다음 호에서 이어집니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