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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건축1(2)공간 구조와 종교 활동의 상호관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 유현준(건축학부 교수)
  • 승인 2018.05.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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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호에서 이어집니다)

모든 건축은 그 건물을 사용하는 기능에 따라 디자인이 결정된다. 종교 건축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장에서는 예배 내용에 따라 건축 공간 변화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교회 건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교회 건축도 시대에 따라 많이 변화해 왔는데 이는 예배의 행위가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기독교는 구약시대 유대교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주요 행위는 예배, 곧 제사였다. 그리고 그 제사는 제사장이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초기 예배 형식의 대부분은 구약시대 모세라는 인물이 정립하였다. 구약성경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설계했다고 전해지는 교회의 첫 번째 유형인 성막이 나온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이스라엘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쌍둥이 형제인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그리고 이 쌍둥이 형제 중에서 동생이었던 야곱이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에 요셉이라는 아들이 형들의 시기를 받아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전화위복 격으로 요셉은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이스라엘 지역에 기근이 들었을 때 야곱의 모든 가족은 이집트로 이민을 가게 된다. 아브라함 때에 하나님이 처음 가나안 땅을 줄 것을 약속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브라함이 제물들을 절반으로 잘라서 광야에 펼쳐놓자 하나님의 불이 그 사이를 지나가며 언약이 이루어진다. 당시의 모든 종교적 행위들은 대부분 동물이나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린 후 제물로 삼는 것들이었다. 어떤 종교는 자신의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던 시절이다. 이런 제사는 동물을 잡고 각을 뜨고 고기를 불에 태우는 순서로 진행된다. 말이 좋아 제사지 거의 도살장과 고깃집이 함께 있는 거라고 봐야 한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 후 지금의 이스라엘이 위치한 가나안 땅으로 간다. 남자 어른의 숫자만 60만 명이었다고 성경에 나오니 여자와 아이까지 합치면 100만 명이 넘는 인구였으리라 추산할 수 있다. 이집트에 들어가기 전에는 70여 명이었던 야곱의 가족이 한 민족 단위로 급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본래 유목 집단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 정착하면서 농경 사회로 그 경제 구조가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백 년을 이집트에 살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스라엘이 광야로 다시 나왔을 때에는 농경 사회에서 다시 유목 사회로 변화해야 할 상황이었다. 재미난 사실은 당시 민족 지도자였던 모세가 40세까지는 이집트의 왕자로 살면서 당대 최고의 농경 사회였던 이집트 문화를 습득한 후, 살인죄를 피해 미디안 광야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면서는 뒤늦게 양치기로서 유목 사회의 기술을 40년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 두 가지 지혜를 체득한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간 텐트 치고 사는 생활과 100만 명이 넘는 사회를 조직화하는 일,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준비된 인재였다. 

  12명의 형제로 시작하여 100만 명이 넘는 사회를 이룬 이스라엘 민족, 그리고 이들이 민족 대이동을 하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도기의 이스라엘은 종교적 딜레마에 마주쳤다. 바로 이집트 노예 시절 농경 사회에 존재한 이집트의 종교성을 이스라엘의 고유의 유대교에서 없애야 했던 것이다. 우상을 만들어서 문제가 되었던 성경 속의 “금송아지 사건”은 이를 잘 드러내주는 장면이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가자, 모세의 친형이자 파트너였던 아론이 이스라엘 민족을 돌보고 있었다. 모세가 한 달 넘게 보이지 않자 동요하기 시작한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숭배한다. 사실 이 금송아지는 농사를 짓는 이집트가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모시는 또 다른 신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을 이끄는 여호와를 눈에 보이는 존재로 만들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어야 하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였기에 크게 책망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400년 넘게 이집트에 살면서 체득하게 된 농경 사회의 종교성과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전통 유대교와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다시 건축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당시에 모세는 이동하면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을 디자인하였는데, 그 구조는 장막을 이용해서 담장을 치고 그 안에 텐트를 치고, 또 다시 그 안에 커튼을 처서 공간을 마당, 성소, 지성소라는 세 가지로 구분한 것이었다. 전 민족이 이동하다가 한 군데 잠시 정착하게 되면, 정착한 진영 가운데 이 성막을 짓고 그 안에서 제사를 드렸다. 제사의 형식은 앞서 말했듯이 양을 도살하여 피를 제단에 뿌리고 고기는 태워 연기를 하늘로 보내는 것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레위 지파 사람들만 할 수 있었는데, 레위 지파 사람들은 이동 시 성막의 모든 텐트와 제사집기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궤를 운반하였다. 모세가 디자인한 성막은 세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담장과 텐트 사이의 공간인 성막 마당이다. 이 공간에는 물두멍이라 불리는, 제사장이 손을 씻는 커다란 물동이가 있었다. 광야에서 물이 얼마나 귀할 지 상상해 본다면 이 물두멍이 얼마나 귀중한 요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물두멍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늘날 성당 입구에도 성수를 담아놓는 작은 그릇이 있다다. 이 마당까지가 민간인들이 진입 가능한 공간이었다. 그 다음의 공간인 텐트 안의 “성소”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보다 더 안쪽의, 성궤가 위치한 “지성소”는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으로 1년에 한번 있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대제사장이 들어간 후 심장마비라도 일으켜 죽게 되어도 시체를 가지러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 발목에 방울을, 몸엔 밧줄을 묶고 들어갔다. 혹시나 그가 죽게 되어 방울 소리가 나지 않더라도 밧줄을 당겨 시체를 끌어낼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듯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커튼은 공간을 둘로 나누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 신약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이 커튼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나온다. 이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로 인하여 막혔던 관계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해소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둘로 나누었던 공간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예전에 남자와 여자가 안방에서 같이 식사를 해도 겸상을 하지 않고 따로 밥상을 차려서 먹다가 개화 이후 근대에 들어서는 같은 식탁에서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평평한 공간을 나눈다는 것은 함께하는 공간에 거하는 사람들이 같은 신분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커다란 운동경기장이나 영화관과 같은 공간은 민주화된 현대 사회를 잘 보여주는 건축 형식이다.

 

유현준(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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