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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는 해태의 마지막 에이스

SK 와이번즈 투수 코치 최상덕(교육90)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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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팀 해태 타이거즈가 기아 타이거즈로 바뀔 무렵인 2000년대 초, 최상덕(교육90)동문은 타이거즈의 암흑기 때 굳건히 마운드를 지킨 에이스였다. 1993년, 최상덕 동문은 본교 야구부 창단 5년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데 기여한다. 그 다음 해인 1994년, 그는 1차 지명으로 당시 투수왕국으로 불리던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해 구단 역대 최고 성적인 준우승을 거두는데 공헌하며 화려하게 데뷔한다. 그 후 잇따른 부상과 슬럼프에도 꿋꿋하게 자기 할 일을 하며 제 자리를 지킨 그는 성공적인 선수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경기장에 서있다. 지도자 생활 9년차임에도 아직 배울 게 많다는 최상덕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최상덕(교육90) 동문
▲최상덕(교육90) 동문

Q. 자신의 마지막 대학리그에서 우승컵을 딴 후 프로리그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치렀지만, 2년차에 큰 부상을 당했다. 그 후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해 소위 ‘마지막 에이스’가 되었는데, 그 과정을 간단하게 이야기해달라.

A. 대학교 4학년인 1993년, 본교가 전국 대학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했다. 그때 나는 최우수선수상을 받았고, 1994년 1차 지명으로 태평양 돌핀즈에 입단해 13승을 하며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냈다. 그리고나서 다음 해인 1995년에 군대에 입대했는데, 그 당시에는 방위병으로 18개월간 복무하며 야구를 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군복무를 하며 프로야구도 같이 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훈련량이 적어져 컨디션을 조절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빙그레 이글스(現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장종훈 선수가 친 공에 얼굴을 맞고 시즌 아웃됐다. 투수들이 공을 던지면 손에 느낌이 남기 때문에 이를 통해 내가 던진 공이 실투(失投)인지 알 수 있다. 나는 공을 잘못 던진 느낌이 들면 제자리에서 점프를 해서 공을 잡을 준비를 하는데, 그때 4번 타자였던 장종훈 선배가 힘 있게 친 공에 얼굴을 맞은 것이다. 그 후 95년에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고, 다시 팔꿈치 부상을 당해 공백이 있었다. 야구팀이 있는 광주로 내려갈 때만 하더라도 지역감정이 심해서 겁을 먹었지만, 막상 가보니 광주 분들이 굉장히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선수들의 기가 굉장히 셌다. 보통 트레이드된 선수들의 성적이 많이 떨어지거나 선수생활을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선수들이나 감독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잘 대해줬다. 트레이드 되어서 10년간 있었던 선수로는 내가 유일하지 않았을까한다.

▲1993년 48회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우승
▲1993년 48회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우승

Q. 부상 이후 슬럼프를 극복하고 에이스로 변모하였다. 슬럼프를 극복한 비결은 무엇인가?

A. 슬럼프의 원인은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정신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 측면이다. 먼저 정신적인 슬럼프는 자신감이 떨어졌기 때문에 온다. 극복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내가 잘했을 때의 동영상을 자주 봤다. 그 당시 투구 폼이 어땠는지 보는게 아니라 내가 잘 던져서 상대팀 타자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영상을 보면서 ‘나는 저런 투수였어’,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신감을 갖는 것이다. 한편 육체적인 슬럼프를 극복하는 나만의 방법은 ‘성실함’이다. 즉 자신이 하던 일을 꾸준히 계속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선수들은 훈련을 더 많이 하거나 훈련을 더 적게 하지만 나는 슬럼프가 왔을 때도 평소처럼 꾸준히 훈련을 했다.

Q. 전성기 때는 매 시즌마다 *완투승과, **완봉승을 여럿 기록했다. 자신만의 비결이 있는가?

A. 선수의 능력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능력보다는 당시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선수들의 분업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투수쪽이 더 그랬다. 지금은 4개의 구종을 던지고 체력이 좋은 선발투수가 앞에 나서고, 중간계투가 나선 후 마무리투수가 등판해 게임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8회에 중간계투와 마무리를 이어주는 셋업맨, 9회에 마무리 투수가 등판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완투승과 완봉승이 많이 발생할 수는 있었지만, 중간에 내려와 후반부에 뒤집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최상덕 선수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최상덕 선수

Q. 2010년에 시작하여 지도자 생활에 접어든지 9년째가 됐다. 지도와 조언을 받던 입장에서 선수에게 조언 하는 입장이 됐는데 어떤 점에서 제일 큰 차이가 느껴지는가?

A. 선수 때는 몸 관리를 비롯해 오로지 ‘나’와 관련된 것들만 하면 됐다. 그러다 코치가 되고 나니 공부할 게 많아졌다. 나 한명만이 아니라 수십 명의 선수를 봐야한다. 수많은 선수들의 특성과 성격을 파악하고, 이를 외워야 지도할 수 있다. 야구에 관한 지식도 많이 필요하다. 나는 주로 이론 서적을 읽으며 공부한다. 미국이나 일본에 전지훈련을 갔을 때 서점에서 관련 책을 구입해 읽곤 했다. 책을 읽고 난 후 그 내용을 그대로 선수에게 적용하는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나만의 기준에 결합시켜 내 것을 만들어 적용한다. 공부하는 입장이다 보니 ‘과거 선수시절 지금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땐 이론 쪽으로는 잘 생각하지 않고, 몸 관리에만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그래서 조금 후회가 있다.

Q. 2013년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코치 시절,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손승락 투수가 수상소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지만 특히 투수는 멘탈이 중요한데, 어떤 조언을 주었는가?

A. 대다수 선수들이 좋은 폼으로 공을 던짐에도 불구하고 “지금 투구 폼 이상하지 않나요?”라며 불안해한다. 객관적으로 말해 기술적 문제로 좋은 공을 던지지 못하는 선수는 1군에 없다. 결국 선수들이 더 잘 하고 싶어서 생긴 불안감이다. 이러한 불안을 해소해주는 게 코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손승락 선수는 상위 클래스의 선수였기 때문에 실력적인 문제는 없었다. 또한 마무리투수는 ‘내 뒤에 아무도 없다’는 정신적인 강인함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의 고민에 대해서 반대로 이야기했다. ‘투구 폼에 전혀 문제가 없고, 지금 페이스에 있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줬다.

▲넥센 히어로즈 투수코치 시절의 최상덕 코치와 손승락 선수
▲넥센 히어로즈 투수코치 시절의 최상덕 코치와 손승락 선수

Q. 현재 프로야구에는 이정후 선수나 강백호 선수, 서건창 선수 같이 고졸 신인으로 프로야구를 시작한 선수들이 많다. 이는 상대적으로 대학 야구의 빛이 바랜 것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싶다.

A. 사회적 흐름인 것 같다, 내가 대학교에 갈 때까지만 해도 대학은 당연히 나와야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후 FA 제도가 생기는 등 제도가 바뀌며 최대한 빨리 프로 구단에 입단해 적응하는 게 낫다라는 인식이 생겼다. 프로 구단은 기업이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내야하고 이를 위한 좋은 선수들을 뽑아야 한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어도 잠재력이 있다면 좋은 선수들을 선발한다. 그러다보면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선수들만 대학에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학야구의 수준이 낮아졌다는 의견이 생긴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명되는 선수가 적은 이유는 대학을 졸업하고나서부터 프로야구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것보다, 20살에 바로 프로 야구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게 더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NC 다이노스의 나성범 선수처럼 대학을 나와도 잘 할 수 있는 선수들이 많다.

Q. 대학야구를 경험한 입장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본처럼 학업과 운동의 병행을 지향해야한다고 생각하는가?

A. 문제는 대학을 졸업한 운동선수가 운동 외적으로 취업을 할 수 있는가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공부한 학생들에게도 어려운 문제인데, 운동선수에게는 더 어렵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 하지 않은 선수들이 대학에서 아무리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줘도 학업을 따라가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를 개선하려면 대학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때부터의 제도가 바뀌어야하는데, 현재로서는 힘든 실정이다. 야구만 놓고 본다면 일본 사회인 야구처럼 독립리그가 더 많이 활성화되어 대학 졸업 후에도 옛날 실업야구처럼 직장을 다니며 야구를 할 수 있는 제도가 생기면 좋을 것 같다. 스폰서가 팀을 운영한다기보단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그 회사 소속으로 야구를 하는 제도가 만들어지면 야구를 접은 사람이라도 꿈에 다시 도전할 수 있고, 선수들의 선택의 폭도 더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Q. 지도자로서의 목표나 바람이 있다면 무엇인가?

A. 올해 전력이 많이 좋아진 만큼 우승을 노리고 있다. 선수들 관리를 잘 해서 좋은 성적을 냈으면 좋겠다. 선수가 잘 되어야 코치도 잘 된다. 지금은 더욱 많이 공부해서 성장해야 할 시기지만, 나중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교에 가서 지도자 생활을 하는 것도 보람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본교 야구부는 현재 장채근 감독께서 잘 지도해주시고 있고, 배구부나 축구부도 좋은 성적을 낸다는 소식을 종종 듣는다. 이처럼 계속 좋은 성적을 내서 프로든 어디든 진출하여 ‘홍익대라면 스포츠에서 알아주지’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명성을 날릴 수 있으면 좋겠다. 실제로도 본교 출신 야구 코치나 감독들이 많은데, 좀 더 뻗어나가서 후배들을 잘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

*완투승: 투수가 9이닝까지 모두 던지고 승리를 기록한 경우를 뜻함

**완봉승: 투수가 완투하여 상대팀에게 전혀 득점을 주지 않고 승리를 기록한 경우를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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