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은 전라북도에서 제일 먼저 부(府)로 승격된 곳이다.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이 된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경술국치는 조그만 어촌에 불과했던 동네를 서해안의 주요 항구도시로 변화시켰다. 일본제국은 군산을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한 통로로 사용했고,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는 항구에 쌀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며 ‘쌀의 군산’이라고 외쳤다. 채만식(1902~1950)의 소설 『탁류』(1937)는 바로 이 시기의 군산을 다룬다. 그는 여러 인물을 통해 당대 사람들이 겪은 아픔과 설움을 이야기한다. 채만식의 고향이자 소설의 배경이 된 군산을 향하며 기자는 고속도로 옆에 흐르는, 반짝이는 금강을 멍하니 바라봤다. 봄을 앞둔, 겨울의 군산은 을씨년스러웠다. 거리 곳곳에 남아있는 녹다 만 눈과 구름 가득한 날씨는 공간을 더욱 칙칙하게 만들었다. 버스에서 내린 기자는 그 곳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라는 것도 잊은 채 낯설어하며 길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스마트폰 배터리가 다한 상황에서 기자는 유년시절의 기억과 바다냄새에 의존해 무작정 걸었다.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가다 기자가 마주한 것은 하나의 혼탁한 흐름인, 탁류(濁流)였다.
여기까지가 백마강(白馬江)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중략…)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중략…)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중략…)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 市街地)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장항과 군산을 갈라놓는 바다는 그 건너 지형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좁아 바다라기보다는 강에 가까웠다. 금강하굿둑 너머는 ‘비단강’이라 일컬어지는 금강인데, 하굿둑 바깥의 바다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탁했다. 바다를 따라 걸어가자 기자는 정주사(丁主事)가 바다를 건너와 정착했다는 째보선창에 이르렀다. 째보(언청이)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째보선창은 공사가 이루어진 이후 소설 속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고, 시골 어촌의 여느 포구와 다를 바 없었다.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포구였다는 이곳의 영화로움은 국권피탈 이후 함께 수탈당했는지 모습을 감추었고, 그저 낡고 오래된 건물과 비슷한 연배의 선박뿐이었다. 눈과 흐린 날씨가 만들어낸 칙칙함은 자신의 본거지인 마냥 그 기세를 한층 더해갔고, 기자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한 커플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해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때조차도 무채색 일색이어서 그 모습은 마치 2018년이 아닌, 빛이 바랜 흑백 사진을 합성한 것 같았다. 모노톤 일색의 공간에서 한 쌍의 남녀가 색색이 빛을 발하듯, 초봉은 그런 존재였다.
티끌 없이 해맑은 바탕에 오뚝 날이 선 코가 우선 눈에 뜨인다. (중략…) 눈은 둥근 눈이지만 눈초리가 째지다가 남은 것이 있어 길어 보이고, 거기에 무엇인지 비밀이 잠긴 것 같다. 윤곽과 바탕이 이러니 자연 선도 가늘어서 들국화답게 초조하다. (중략…) 조그맣게 그려진 입이, 오긋하니 동근 주걱턱과 아울러 그저 볼 때도 볼 때지만 무심코 해죽이 웃을 적이면 아담스런 교태가 아낌없이 드러난다.
초봉이 양약국에 나와 있으면서 가게의 매출은 배로 뛰어올랐다고 했다. 많은 남성들이 자신들에게 필요 없는 화장품을 사면서라도 그녀를 보고자 했다. 고달픈 일제 치하에서 모나지 않은 성격과 아름다운 자태를 갖춘 그녀는 그들의 삶에 있어서 활력소가 되었을 것이다. 뭇 남성이 그녀와의 혼약을 꿈꿨고, 그의 아비인 정주사는 이 점을 이용해 자신의 유흥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겼다. 결국 초봉은 자신의 사랑을 뒤로한 채 정주사의 회유와 가족을 위해 고태수와 결혼한다. 기자는 겉만 번지르르한 은행원 고태수가 다닌 조선은행(現 근대건축관)으로 향하며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결정과, 개인의 유흥을 위해 딸을 판 정주사를 떠올렸다.
“네가 가서 고생이나 않구 호강으루 살기두 하려니와, 또 그 사람이 밑천이라두 대주어서 장사라두 하면, 그게 그대지 나쁠 일이야 없지 않느냐?”
현재 근대건축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건설 당시 그 용도가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2층과 높은 지붕을 올려 그 시절 군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자리했다. 건물은 마치 허세 가득한 고태수를 형상화한 듯 했다. 건물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고태수와의 결혼 생활은 길 건너의 폐건물처럼 보잘것없었다. 난봉꾼이었던 고태수는 불륜 중 비명횡사했고, 그녀가 결혼을 결심하게 한 그의 배경은 모두 허구였다. 과부가 된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전의 따스한 시선이 아닌 고난뿐이었다. 초봉이 갖은 시련을 겪으며 본연의 색채를 잃어갔듯, 근대건축관과 군산세관 등 잘 보존되고 정비된 건축물은 구한말 쌀을 실어 나르던 철도와 폐건물 속에서 그 색을 잃고 주위에 동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더군다나 이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일제의 수탈 과정에서 세워졌다는 사실은 불편함을 가중시켰다.
프랑스의 대문호 모파상(Henri Rene Albert Guy de Maupassant, 1850~1893)이 에펠탑을 보지 않기 위해 에펠탑의 음식점에서 식사를 한 것처럼, 기자는 불편함을 회피하기 위해 일본 회사를 개조한 카페에 들어가 숨을 돌렸다. 배터리가 다한 휴대폰을 충전하며 휴식을 취한 기자는 짐을 두고 나와서 카페 주변을 걷다 작품의 등장인물을 형상화한 동상을 마주했다. 두 손을 모은 초봉의 동상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부모에 떠밀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던 소극적인 모습과, 온갖 고난에 찌들어 삶을 포기한 그 모습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동상에 담겨
있었다.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 가해자의 동상과 대비되는 그녀의 동상은 그저 초봉 개인만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당한 가해자와 죄 지은 모습을 한 피해자. 일본식 건물 사이 초라하게 서있는 그녀의 모습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초봉 개인이 아니라 당시의 국민이었고, 국권이 사라진 국가로 다가왔다. 길진 않았지만 유년시절을 보낸 곳에서 친구를 만나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 곳에 왔던 기자는 초봉이 자신의 딸을 안고 서울로 도피하듯 충전이 끝나지 않은 전화기를 들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소설 속 이야기로 돌아가서, 초봉은 서울로 가던 도중 자신을 어여삐 여기던 약국 주인 제호를 만난다. 그는 그녀를 위해주는 척하며 첩으로 삼고 살아가다 싫증이 나서 그녀를 형보에게 넘겨준다. 이후 초봉은 딸 송희를 인질로 잡혀 죽지 못해 살아가다 결국 형보를 죽이기에 이른다. 궁지에 몰려 자살하려던 초봉은 동생과 첫사랑을 만나 자수를 결심하며 아직 삶이 끝나지 않고 희망이 남아있음을 인지한다. 이야기의 흐름에 따른 초봉의 생애는 강에서 바다로 흐르며 탁해지는 탁류와 비슷하다. 또한 이는 조선 후기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흐름과도 유사하다.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본 금강은 반사되는 햇빛이 물들어 그 이름처럼 비단과도 같았다. 해맑게 반짝이는 그 강물을 보며 도망치듯 집으로 향하던 내내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