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민국에는 미투(Me too) 운동과 낙태합법화 운동 등 인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여성, 인권, 생명,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물건 하나 가 있다. 바로 ‘피임 기구’다. 성인의 비밀스러운 물건 정도로 여겨지던 피임 기구에는 탄생부터 널리 상용되기까지 인권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기에는 생명 탄생에 대한 숙고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보호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피임 기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인권과 생명권의 주체에 대해 깊이 생각 해볼 수 있다. 지금부터 무수한 역사 속 피임 기구가 가진 무거운 존재감에 대하여 들어보자.
▲피임 기구: 콘돔과 자궁 내 피임 기구
성교를 통한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일정한 수단을 통해 막는 행위를 ‘피임’이라 하는데, 이를 위해 사용하는 기구를 피임 기구라고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피임 기구는 ‘콘돔(Condom)’이다. 피임이나 성병 예방의 목적으로 성교 시 남성의 음경에 씌워 사용하는 고무 제품인 콘돔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가장 오래된 기록 은 안토니우스 리베라리스가 기원전 150 년경에 저술한 <변신>에 쓰여 있다. 미노스(Minos)는 그의 정액 안에 뱀과 전갈이 살고 있어 성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염소의 방광을 여성의 질 속에 넣어 성행위를 즐기는 묘안을 생각해냈는데, 이것이 바로 콘돔의 가장 오래된 유래다. 콘돔이라는 용어는 17세기 영국 국왕 찰스 2세의 주치의였던 콘돔(Condom) 백작이 고무를 사용하여 지금 모습과 가장 유사한 콘돔을 발명하면서 그의 이름을 따 콘돔이라 고 불리기 시작했다. 콘돔은 피임률이 높고 사용 방법이 간단하며 부작용이 거의 없어 가장 대표적인 피임 기구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현대 의학의 발달로 여성의 자궁 내 기구를 삽입하는 피임방식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그 중 루프(Loop)는 구리선이 감긴 T자형의 기구이며 미레나(Mirena)는 정자의 이동과 착상을 억제 시키고 수정을 방해하는 호르몬이 함유된 기구이다. 루프와 미레나 모두 피임률이 높은 편이며 임신 계획이 있거나 더 이상 사 용을 원하지 않을 경우 기구를 제거하면 임신이 가능하다. 이러한 피임 기구는 자궁 안에 설치한다는 부담 때문에 보통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주로 사용한다. 두 피임 기구 모두 시술 후 3~5년 간 효과가 지속되며 한번 장치하면 계속 피임이 가능하고 삽입 직후부터 유효하다. 또 시술 후 아기를 원할 경우 제거 후 임신능력으로의 전환이 빠르고 성생활에 지장이 없으며 경제적이고, 수유부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시술 후 생리양이 줄어들고 생리 기간이 짧아지며 생리가 중단되는 경우도 있는 등의 부작용이 존재 한다.
▲피임 기구, 주체로서의 선택과 인권을 보호하는 수호신이 되다
피임 기구는 무엇보다도 사용 주체의 결정권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피임 기구 사용은 연령대를 불문하고 ‘성적 자기 결정권’의 행사로서 실현되어야 하며 임신과 출산 주체의 심사숙고에 따른 능동적인 결정이어야 한다. 성관계는 임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신중하게 피임 기구를 이용하여 한 생명이 준비된 환경에서 태어나 온전한 인권으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근 법무부가 ‘낙태죄 합헌’이라는 의견을 발표하며 여성의 선택권과 주체성에 대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 24 일(목)에는 낙태죄 위헌 여부를 가리기 위한 공개변론을 앞두고 서울 헌법 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반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들이 시위를 진행하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의 주체는 여성이므로, 임신 이후 출산도 온전히 여성 선택 하에 이루어져야 하며 낙태죄 폐지가 여성 차별 해결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여성 인권이 지금보다 멸시받던 과거에는 여성이 피임약을 먹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에 아일랜드에서는 피임에 대한 법적 제한에 적극적으로 나선 여성들이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1971년 5월, 아일랜드 여성 운동가 49명이 세계 각국 미디어의 주목을 받으며 북아일랜드 수도로 향해 처방전 없이는 구입할 수 없었던 피임약 대신 아스피린을 수백 정 구입한다.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아스피린을 피임약으로 오인해 압수하려던 공권력에 맞서 가짜 피임약을 삼키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이들의 도전을 통해, 여성의 피임에 대한 사회적 금기는 깨졌다. 과거 피임약은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폭력의 상징이었으나 아일랜드 여성들로부터 시작된 여성의 움직임 이후 피임약은 여성들의 인권 보호와 자기 결정권 행사의 의미로 자리 잡게 된다. 피임 기구는 여성 인권뿐만 아니라 성적 책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2017년 여성가족부는 청소년에게 성 문화를 조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청소년 콘돔 판매 금지 정책’ 을 발표했다. 이러한 정책의 배경에는 ‘청소년은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 되며, 성관계는 성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정책을 ‘쾌락통제법’이라 비꼬기도 했다. 이와 같은 금지 정책은 결국 2017년 5월 헌법재판소 심판대에 올랐다. 청소년보호법의 청소년 유해물건 지정 기준인 ‘청소년의 심신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우려’라는 부분이 명확하지 않고, 여성가족부가 청소년보호법 에서 규정한 권한 이상으로 청소년 유해물건을 지정해 적용하고 있다는 게 위헌 소송의 이유였다. 청구 이유에는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청소년 콘돔 판매 금지는 청소년의 성적 책임권을 무시한 정책이며, 청소년은 무조건 성 문화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주의에 기인한 논리이다. 보건복지부는 2015년 청소년들의 첫 성경험 나이는 만 12.8~13.1세로 중학교 1, 2학년 정도라고 밝혔다. 이처럼 아이들의 성적 성숙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임 기구 구입부터 차단하는 것은 청소년의 성적 책임권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또한 콘돔 등의 피임 기구를 구하기 어려운 환경도 청소년들에게 성적 결정권을 교육하는 데 있어 적절하지 않다. 성적 책임은 성인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며 어리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성 문화를 차단하기보다는 피임 도구 사용 방법 및 청소년의 성숙한 성 의식을 재고하기 위한 실용적인 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여성, 생명, 인권, 그리고 피임 기구
모든 성적 행동에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인권 감수성이 수반되어야 한다. 피임의 1차 목적은 원치 않는 임신을 막고 임신의 주체가 될 여성의 삶을 보호하는 것이다. 원치 않는 임신이 이루어질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은 생명의 모(母), 부(父)에 있지만 여성이 혼자 아이를 낳아 양육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 유해 환경 접촉 종합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피임을 하는 청소년은 39%이며 결혼 전 임신을 한 여성 청소년의 66%는 임신 중절 수술을 선택한다(2012). 또 우리나라의 15세 미만의 미혼모는 19명, 19세 미만(15세 미만 포함)의 미혼모 3,000명, 24세 미만의 미혼모(15세 미만 포함)의 미혼모 24,000명이었다(2000). 약 20년의 시간이 흐른 것을 감안하여 현재 우리나라의 미혼모 수를 추정하면 34,000명이다. 이들은 임신이라는 결과에 책임지지 않은 상대 남성들 때문에 열악한 환경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인권 감수성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이다. 어린 나이에 성관계를 하는 것은 일탈이며 잘못이라는 보수적인 생각이 귀중한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하였고, 결국 청소년들을 안전한 성 문화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는 것이다.
피임 기구는 임신을 사전에 예방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피임 기구’는 성인 용품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며 특히 결혼 전의 청년들에게 암묵적으로 금기시 되어왔다. 임 신 방지라는 수단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보수성과 기성세대의 고집으로 생긴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청소년들은 약국이나 편의점에서 콘돔을 구입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피임 기구 구입 억제 정책은 모(母), 부(父)뿐만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서 자랄 아이의 인권까지 무시하는 행위가 되었다. 이에 피임 기구의 역사와 의의를 알아보고, 사회적 인식과 시선이 조장하는 폐해를 인정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나라에 건전한 성 문화가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변화이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안전한 성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격려하는 분위기 조성에 개개인이 적극적으로 노력할 때 여성, 생명, 인권이 적극적으로 보호되는 사회가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