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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공간과 그 적들: 사무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유현준(건축학부 교수)
  • 승인 2018.09.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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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 이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

국가의 부가가치가 대부분 농사를 통해 창출되던 시절, 다른 것으로 돈을 벌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상업이다. 피렌체와 베니스인을 그 대표로 들 수 있다. 베니스는 특히 동양과 서양 간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조선술 또한 탁월하여 직접 만든 배를 가지고 동서양 무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이처럼 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농업 기반 도시보다 더욱 밀도 높은 도시를 형성하면서 살았다. 이들 시대보다 더 과거인, 고대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하는 구약 성경에는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가 나온다. 이 도시는 당시 황금과 같이 귀한 품목인 소금을 팔던 곳이었다. 상업에 근거를 둔 경제구조이니 농사 지을 땅이 필요 없고, 자연스레 고밀화된 도시가 형성되었다. 도시 고밀화가 진행되면 인류의 짝짓기 본능이 자극되는가 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죄악의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가 탄생한 것이리라. 인구밀도가 낮은 시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만 계속 살았다면 새로운 이성을 만날 기회도 적다. 따라서 성적인 자극이 덜하기에 도시보다는 성범죄율이 낮다. 반면 상대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게 형성되었던 소돔성과 고모라성은 그만큼 성범죄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당시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고밀화된 도시에 살고 있다. 어쩌면 지금의 서울이 성적인 욕망이라는 면에서는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자극적인 도시일 것이다. 다만 여러 가지 법과 치안으로 형성된 일정한 규칙들이 욕망을 제어할 뿐이다. 적절한 분출구와 제약 장치들이 도시가 아수라장으로 되는 것을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면 화성이라는 시골의 중소도시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곧 연쇄적인 미제 사건들로 번지게 되었다. 어떤 범죄심리학자가 왜 화성시에서 유독 강력범죄가 많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한 적이 있다. 그의 이론은 화성이 대도시인 서울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중소도시라는 사실에 초점을 둔다. 범인은 큰 도시에서 주로 생활하며 강력한 치안 하에 본능을 억누르다가, 화성시같이 접근이 용이하고 상대적으로 치안이 약한 근교의 도시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이렇듯 농업으로 문명이 발달 정착되고, 상업을 통해 도시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도시의 고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산업혁명의 물결이 인류를 강타한 다음이다. 지금은 인류가 역사상 가장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시대이다. 그 시작은 18세기 중엽 영국의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은 기계를 움직여 물건을 생산해내는 것이어서 땅과 햇볕이 필요 없다.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실내에서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건축기술력도 발달해서 7~8층 정도까지는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물건을 만들어서 팔려면 여러 과정이 있다. 면직물 생산 과정을 예로 들어 보자. 목화를 따면 배를 통해서 항구로 들여 오고, 방적기계를 통해서 옷감을 생산하고, 이 옷감으로 공장에서 옷을 만들고, 옷을 팔기 위한 가게가 있고, 옷을 살 소비자들도 많아야 하고, 다시 수출할 항구도 가까워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농업사회에서는 경작을 위해 흩어져서 살아야하지만, 공업사회에서는 사람이 가깝게 모여살수록 이익이 많다. 이러한 필요조건을 따라 사람들은 점차 고밀화된 도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시계탑

산업혁명을 거치며 공장 시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해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돌아와 잠드는 생체리듬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9시까지 출근하며 살게 되었다. 게다가 농사를 지을 때는 농한기인 겨울에 놀 수 있었는데, 산업사회에서는 겨울에도 난방이 되는 실내에서 일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지옥철을 타야하고 일 년에 두어 주일 밖에 쉬지 못하는 샐러리맨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시계를 차고 다닐 수가 없었다. 회중시계는 부유한 귀족들의 상징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청이나 학교에 있는 시계탑의 시계를 보면서 그 시간에 맞추어 살아야 했다. 시계탑이 있는 런던의 빅 벤과 같은 건축물이 당시의 세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때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있었다. 시간약속에 30분 정도 늦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국 사람의 모습을 비판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시계가 흔치 않던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다. 해시계, 물시계를 보면서 자시, 축시 같은 2시간씩 끊어지는 단위로 살던 사람들에게 30분은 오차범위 이내의 시간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도 수십 년의 산업화를 거치면서 지금은 시간을 잘 지킨다. 누구라도 정시에 떠나는 기차를 놓치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 시기를 거쳐 90년대에는 10분 정도의 지각은 용인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각자의 손목시계가 그 정도의 오차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더 슬프다. 핸드폰 안의 시계가 1초도 틀리지 않게 싱크로 되어있으니 온 국민은 더욱 더 정확하게 살아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정확한 삶은 수백만 년을 거치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인간의 생체리듬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더욱 힘겨운 것이다.

유현준(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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