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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역, 열화당, 2018

<대중예술의 이해> 이선윤 교수가 추천하는 『본다는 것의 의미 ways of se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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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예술 비평가이자 소설가, 문화사회학자로 알려진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는 예술과 인문, 사회에 대한 고찰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의 의미에 관련한 물음을 던져왔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언인지 안다.” 『본다는 것의 의미』의 위와 같은 첫 문장을 통해 버거는 시각의 언어에 대한 우위가 아니라,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밝힌다. 현실을 인지하기 위한 기초 데이터를 제공하는 시각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게 해주며, 타자와 자아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형성하도록 한다. 지각의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우리는 세계가 자신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우리와 세계는 연속적이지만, 그러한 연속성은 시각을 통해 분리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세상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이기도 한다. 일종의 망각과 착각을 일으키기 쉬운 것이 시각이기도 한 것이다. ‘알고 있다’는 의미와 ‘보고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다. 가령 두 가지가 일치한다고 해도 그것이 세계의 객관성과 일치하는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과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진 데이터 과잉의 세기 속에서 헤엄치는 우리에게 인지 방향의 선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와 동시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결단의 필요성이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버거의 지적처럼,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인용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듯 피렌체의 궁전에 쌓인 그림들은 하나의 소우주를 대변하고, 그 예술품의 소유주는 이들을 통해 세상을 재창조할 수 있었다. 시각 표현은 결코 현실과 유리되어 있지 않으며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표현하기도 하고 그에 봉사하기도 한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앤드루스 부부>를 분석한 버거에 대해 로렌스 고잉은 “존 버거가 이 훌륭한 작품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의미와 우리 사이에 어떻게든 끼어들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대원칙…즉 더럽혀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대자연에서 느끼는 진정한 빛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이야말로 이 작품의 주제다.”라는 고잉의 강력한 항의는 시각이라는 장에서 벌어지는 의미 게임에 버거 식의 “끼어들기”가 왜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오히려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눈을 감은 채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공포의 시작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보려 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의 시각은 광학기술 및 디지털 테크놀러지 등을 통해 점차 확장되고 있지만, 나와 연결된 세상, 그리고 그것이 포착된 시각이미지를 보려고 하는 의지도 이에 비례하고 있을까. 만일 의지는 소멸해가고 ‘보여지는 것’의 자극 쪽으로만 현혹되고 있다면, 그 때가 바로 존 버거와 같은 ‘끼어들기’가 시도 되어야 하는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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