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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 신기영상, 1916, 견본채색, 104.0x64.0cm, 소장번호 2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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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 신기영상, 1916, 견본채색, 104.0×64.0cm, 소장번호 2069.hwp
채용신, 신기영상, 1916, 견본채색, 104.0×64.0cm, 소장번호 2069.hwp

채용신(1850-1941)은 조선 말기와 근대 화단에 걸쳐 활동한 화가로, 다양한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특히 초상화로 이름을 알렸다. 1886년에 무과 급제하여 여러 곳의 관직 생활을 하던 중 고종의 주관 하에 진행된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할 태조 어진 제작에 화사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1906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후 전라도로 낙향하고 지역 화가로서 다양한 계층의 인물 초상화를 그렸다.

채용신은 1905년 최익현 초상화 제작을 시작으로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신기영을 비롯한 임병찬, 황현, 조한범 등 많은 우국지사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중 신기영 초상화는 입상과 좌상의 두 점이 전해지고 있다. 입상은 개인 소장이고 좌상은 홍익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신기영(1864-1907)은 충북 제천의 사족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동료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등지를 돌며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1907년 8월 경북 예천의 대평 시장에서 일제 토벌대와 교전 중 부하 14명과 함께 순국하였다.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신기영상> 속 신기영은 전신궤좌상(全身跪坐像)을 취하고 있는데, 무릎을 꿇고 공수(拱手)를 하는 자세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키가 실제보다 크게 묘사되고 표현상 비례감이 유지되기 어려우나, 채용신은 비교적 안정된 자세로 표현하여 완성도 높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그가 이 시기에 제작한 초상화들은 공통적인 특징을 보이는데, 담채와 미색으로 선을 강조했으며 공수 자세로 손의 노출이 없다. 돗자리와 부채 등의 소품이 등장하며, 신체를 이상적인 비례로 표현하였다. 엄숙하고 정적인 분위기가 주를 이루며 전통적이고 단순하며 이상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채용신은 말년에도 초상화 주문 제작을 요청받고 그려주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1년 6월 4일, 92세로 생을 마쳤다. 일본화와 서양화가 조선 화단에 유입되고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화필과 독자적인 그림 세계를 형성한 채용신의 화업은 당대 화가들의 것과 차별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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