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미술에서 사회적 의미를 찾아내는

미술평론가 홍경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술작품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대부분의 관람객은 단순히 ‘예쁘다’, ‘흉측하다’와 같은 간단한 감상에 그칠 것이다. 여기 하나의 미술작품을 보고 조형요소와 원리, 미학적 의미, 사회적 의미를 찾아 풍성한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술평론가가 있다. 전시 속 미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사회를 해석하는 홍경한 미술평론가를 만나보자. 

 

Q. 미술세계, 퍼블릭아트, 경향아티클의 편집장과 강원국제비엔날레의 총감독을 역임하는 등 미술 평론 분야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미술평론가가 된 이유와 미술 잡지사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A. 미술평론가는 다른 직업과 비교했을 때 얽매임이 덜한 자유로운 직업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예술과 항상 함께할 수 있고 작가와도 소통할 수 있다. 비교적 제약이 적은 환경에서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잡지사의 기자로 일하게 된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작가의 작품을 접하고 교류하며 이를 바탕으로 쓴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전환점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평론가와 잡지사 편집장으로 있으며 느낀 미술 평론가의 존재 의미라고 생각한다. 잡지사에서 오래 지냈지만 얽매임이 덜한 곳이라 평론가로 활동하며 겸임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덕분에 잡지사에서 일하며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부산비엔날레 집행위원, 서울시립미술관 기획전 <공허한 제국> 예술감독 등을 역임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방송, 강의 활동과 더불어 《경향신문》, 《주간경향》, 《YTN》 등에서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는 미술평론가로도 활동하며 대림문화재단 이사, 인천아트 플랫폼 운영자문위원, 박수근미술관 운영 및 자문위원, 금천구 도시디자인위원회 위원, 청주공예비엔날레 기획운영위원 등으로 일하고 있다.

 

Q. 미술전시를 기획하거나, 작품을 평론할 때 본인만의 기준 또는 방법이 있는가?

A. 나는 ‘사회적 의사표시’로서의 미술에 신뢰를 보낸다. 미술은 ‘장식’이 아니고, 전시는 사람들에게 심미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술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를 통해 미술이라는 언어가 사회에서 작용하는 양상이다. 이것이 전시기획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다. 평론에 있어서는 여타 평론가들처럼 조형요소와 원리를 파악하고 미술사적, 미학적 의미를 따진다. 또, 시대적 흐름에 맞는지에 대해 분석해본다. 평론 과정에서 다른 평론가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평론을 쓸 때 상대가 듣기 좋은 말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줄이든 두 줄이든 내 개인적인 의견을 써 내 비평이 일명 ‘주례사 비평’이 되지 않도록 한다. ‘주례사 비평’은 내게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판이 아닌 평론에 무게를 둔다. 비판과 평론의 의미는 엄연히 다르다. ‘비판’은 어떤 현상과 상황에 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이고, ‘평론’은 문제의식에 그 원인을 분석한 후 가치 구분까지 더하는 것이다. 나는 작품이 동시대 미술계에서 얼마만큼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평론가의 판단이 담긴 평론을 지향한다.

Q. 최근 다양한 매체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블로그에 비평글을 지속적으로 올리시면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는데, 다른 매체를 통해 소통할 계획이 있는가?

A.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매체는 시대 흐름에 따라 늘 변화한다. 요즘은 유튜브가 개인 미디어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없던 미디어와 소통방식이 늘 등장하지만, 오늘의 새로운 매체도 내일이 되면 옛것이 된다. 그래서 매체의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또 새로운 매체에는 너무 빨리 정보가 올라오고 많은 이들이 댓글을 다는 구조라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클릭 몇 번으로 새로운 매체에 접근할 수 있지만 흐름에 휩쓸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거부감이 든다. 반면, 블로그는 고전적인 소통의 장이지만 정겨움이 있다. 블로그는 그 특성상 변화에 한계가 있지만 다른 매체에 비해 장문의 글을 진중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인스턴트 음식 같다면 블로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공기와 같다. 블로그가 페이스북에 비해 파급력은 약하지만 상관없다. 블로그를 14년째 운영 중인데 이제 블로그는 나의 역사가 됐다.

Q. 2014년 ‘ART STAR KOREA’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었다. 논란이 많았던 프로그램인데 이 논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A. ‘ART STAR KOREA’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방송을 통해 미술계가 고질적으로 안고 온 여러 사안을 화두로 기존 미술계의 행태와 위선적 태도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예술가들의 창작 과정을 보여주고 비평의 전개를 엿보게 하는 ‘ART STAR KOREA’가 받은 비난은 크게 3가지였다. 첫 번째는 거대 미디어 자본에 잠식되는 예술에 대한 비판이었고, 두 번째는 예술의 서열화에 대한 비난, 세 번째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을 어떤 기준과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느냐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 모두 자기반성의 문제지 비난의 근거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거대 미디어 자본에 잠식되는 예술에 대한 비난은 오히려 전형적인 미술계의 위선을 방증한다. 예술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예술은 언제나 당대 권력자를 비롯해 부유한 상인들로부터 요구됐고 예술가들 또한 그 대가를 취하며 창작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처럼 미술의 역사는 자본과의 접점에서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다. 두 번째 이유인 예술의 서열화에 대한 비난은 인정한다. 예술은 서로 다를 뿐 우열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상황이 달라진다. 미술계는 오랜 시간 많은 레지던시를 비롯한 공모전, 각종 미술상을 개최하며 우등과 열등을 가려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이나 그 원조 격인 영국 테이트 브리튼이 제정한 ‘터너프라이즈’ 또한 경쟁구조 속에서 낙점하는 방식임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ART STAR KOREA’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이러한 제도들에는 침묵한 것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이유는 예술작품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느냐이다. 만약 예술이 평가할 수 없는 신성의 영역이었다면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비평의 역사는 함몰되어야 맞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이미 평가해왔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지원금, 레지던시, 미술상, 공모전 등 역시 작품을 평가하고 극소수에게 혜택을 주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Q. 미술평론가를 희망하는 본교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A. 삶에 있어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그 방향 내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면 좋겠다. 할까 말까 망설여지면 보통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던데, 난 반대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의지와 열정이 있는 한 모든 일은 질서를 찾고 수습된다고 생각한다. 저지르고 나면 결국 내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미술평론가가 되고 싶다면 일단 행동으로 실천해보면 좋겠다. 읽고 쓰고 보고 생각하기를 반복하면 된다. 이 과정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꿈을 이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도가 어렵게 느껴지고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위치를 바꿔보면 좋겠다. 위치가 달라지면 관점이 달라지고, 관점이 달라지면 사고가 달라진다. 사고의 변화는 내 안의 구조를 변경시킨다. 그리고 그 구조 끝에는 이전엔 보지 못했던 길이 놓여 있을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