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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예‘술’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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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가 시작되는 매년 3월, 신입생들은 당당하게 학생증을 달고 ‘학생’으로서의 첫걸음을 뗀다. 학생들은 함께 연구와 작업을 이어나갈 학우들과 지도해주실 교수님들을 만나고자 학문과 예술의 배움터, 대한민국의 거대한 교육기관 대학교(大學校)에 등교하고 있다. ‘새파란 새내기’는 ‘헌내기’ 고학년들의 쏟아지는 조언에 정신이 없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 교수는 이런 학생을 좋아해.”, “저 교수는 저런 작업을 좋아해.” 새내기는 혼란스럽다. 그가 고대하던 동료 학우들의 조언은 바로 전공 교수들의 ‘취향’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과연 학생인가, 서비스직 사원인가.’ 갓 20살 성인이 되어 대학교에 온 새내기는 자신이 학교에 온 것인지, 벌써 사회생활을 하러 회사에 온 것인지 헷갈린다. 수업이 시작하는 강의실로 들어와 바글거리는 인원 사이에 끼어앉은 새내기는 주위를 둘러본다. 한 학년 80명에서 100명. 이들과 모두 동료 작가가 되는 것인가?

 

청년 예술가들의 과거 미술 담론과 영향력을 돌이켜보다

▲<한강변의 타살>,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1968
▲<한강변의 타살>,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1968

1968년 10월 17일 오후 4시, 제2 한강교 아래로 세 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그들은 준비해온 삽으로 모래사장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판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들이 들어간 구덩이를 모래로 메우며 한강 물을 퍼붓는다. 하지만 세 청년들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결연하다. 세 청년들은 다시 구덩이에서 나와 비닐에 글자를 쓰고는 몸에 걸친다.

“문화 사기꾼, 문화 실명자, 문화 기피자! 문화 부정축재자! 문화 보따리장수! 문화 곡예사!”

그들은 비닐에 쓴 글자를 큰소리로 읽고는 비닐을 태워버린다. 세 청년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이 무슨 미친 짓이냐”라는 제목과 함께 신문에 실리게 된다.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1960년대의 기성작가들, 그리고 청년들의 생각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 한국미술계에는 앵포르멜(Informel) 회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는 유럽에서 나타난 회화 경향 중 하나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전(戰前)의 미술 형태인 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며 새롭게 떠오른 ‘표현적’ 추상회화다. 앵포르멜은 말 그대로 형식(form)을 부정한다(in)는 의미에서 이전 기성작가들의 추상화와는 다르게 형식이 아닌 서정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국내 앵포르멜 회화 확산의 중심에는 1957년에 설립된 ‘현대미술가협회’가 있다. 김창렬, 하인두, 박서보 등이 주도한 이 협회는 1961년에 열린 연립전을 마지막으로 해체하기까지 6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하지만 당시의 작가들이 앵포르멜에 편향되면서 한국미술계는 앵포르멜 일변도의 모습을 보였다.

이때, 갓 대학을 졸업한 강국진, 김인환 등 7명의 뜻있는 청년 예술가들이 모인다. 그들의 행보는 꽤 열정적이고 의기양양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잡지를 만들게 되는데, 바로 『논꼴아트』(논꼴동인지)이다. 『논꼴아트』는 미술계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 문제부터 작가 개인의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들의 토론 내용을 담았다. 이는 당시 청년 예술가들로 하여금 청년들만의 담론을 형성하면서 단순히 시대 경향에 따른 작품만이 아닌 이전에 없던 새로운 논의와 시도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들의 활동으로 맺은 결실이 바로 <청년작가연립전>이다.

 

‘행동’하는 화가들

▲‘행동하는 화가’들 청년 작가 연립전 개최, 『홍대학보』, 1967.12.15
▲‘행동하는 화가’들 청년 작가 연립전 개최, 『홍대학보』, 1967.12.15

「행동하는 화가」들 청년 작가 연립전 개최

1967년 12월 15일, 『홍대학보』에 한 기사가 실리게 된다. ‘행동하는 화가들’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본교 출신의 청년들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들은 <청년작가연립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한자리에 모여 1967년 12월 11일부터 16일까지 중앙공보관 123 화랑에서 전시를 열었다. 당시 <청년작가연립전>은 등장만으로도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각종 기성 언론에서도 ‘괴상한 것들의 건강한 도전’(조선일보), ‘고정관념에 도전’(동아일보) 등의 제목을 내건 기사들을 내보내며 이들을 주목했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앵포르멜이 유행하던 1960년대. 당시 한국 미술계는 하나의 화풍에만 집중되었다. 청년들은 이때 기성세대의 미술 양식에 의문을 품는다. 결국 청년들은 앵포르멜 추상의 매너리즘과 그 때문에 일어난 침체적인 분위기에 대응해 ‘탈(脫) 앵포르멜’을 외치며 <청년작가연립전>를 개최하였다. 전시 개막을 앞둔 1967년 12월 11일 오전 10시, 청년들은 ‘행동하는 화가’, ‘현대미술은 대중과 친하다’와 같은 내용의 피켓을 들고, 현대미술의 진흥을 촉구하거나 기성 화단만을 옹호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을 비판하며 거리에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작업 방식에 대한 정당성을 외치기 위해 작업실을 나오게 된 것이다. 행진을 하는 동안 일부는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이 가두시위는 정치적 아방가르드로서의 ‘행위예술’(Performance art)*이라는 선례를 남겼다.

<청년작가연립전>은 오리진 동인, 무동인, 신전동인 세 개의 동인**그룹이 주최한 전시이다. 이들은 모두 탈 앵포르멜을 표방하며, 각기 다른 형태로 작품을 선보였다. 오리진 동인은 앵포르멜 같은 형식이 없는 형태가 아닌, 기하학적 추상을 지향하면서도 서정적이라는 점에서 당시 서구의 기하추상과는 다른 경향을 보였다. 무동인은 일상적인 오브제를 작품재료로 사용하고 전위적인 표현을 지향했다. 무동인과 유사한 목소리를 낸 신전동인은 추상 이후의 전위작품 제작에 전념하며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표현에 주력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무동인과 신전동인이 함께 작업한 한 작품은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불을 붙인 초를 비닐우산에 꽂는 사람, 우산을 든 사람, 노래를 부르며 그 주위를 도는 사람들. 언뜻 보면 종교의식의 한 장면 같은 이것은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라는 작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행위예술로 알려져 있다. 작업에 참여했던 심선희는 당시 인터뷰를 통해 현대문명을 나타내는 비닐우산과 정신을 상징하는 촛불을 대비하며 비닐우산을 망가뜨리고 짓밟는 것으로 일종의 문명비판을 시도하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가자인 이태현은 비닐우산을 짓밟는 행위가 기성화단을 누르는 것을 의미하며 촛불은 그들이 하는 새로운 미술을 형상한다고 밝혔다.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계기로 청년들은 행위예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관객 혹은 행위자로서 작업에 함께하는 참여자들의 기준 또한 넓혀져 갔다. <청년작가연립전> 이후 열린 세미나의 <투명풍선과 누드>(1968)와 <한강변의 타살>(1968)이 바로 그 대표격이 된다. <투명풍선과 누드>는 여성 작가인 정강자가 직접 모델이 되어 관객들이 그녀의 신체에 풍선을 붙였다가 터뜨리는 행위로 이뤄진다.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그저 구경꾼이 아닌 참여자가 된다. 이것은 관객들이 단순히 객체가 아닌, 작업의 주체가 되었던 큰 변화였다. 또한 여성 작가가 중심이 된 페미니즘적 퍼포먼스는 파장을 일으키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정강자, 강국진, 정찬승 세 명의 청년은 제2한강교 아래에서 <한강변의 타살>이라는 퍼포먼스 작업을 진행한다. <한강변의 타살>은 기성 미술계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자 실험적 예술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위상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행위였다.

이렇듯 <청년작가연립전>의 사회 참여적인 발언은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한강변의 타살>로 이어졌다. 당시의 청년예술가들은 기성화단에 대응해 실험적인 미술을 시도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다양한 예술 형태로 대중과의 거리를 좁혀나가고자 노력했다.

 

‘운동’으로서의 미술

▲<감옥>, 최열, 유채, 130x97cm, 1979, 개인소장
▲<감옥>, 최열, 유채, 130x97cm, 1979, 개인소장

“참된 예술은 생동하는 현실의 반영태로서 결실되고 모순에 찬 현실의 도전을 맞받아 대결하는 탄력성 있는 응전 능력에 의해서만 수확되는 열매이다.”-『현실동인 제1선언』

1969년, 오윤(1946~1986)을 비롯한 청년작가들이 소리 내어 외친 목소리다. 그들은 현실동인을 결성하여 제도화된 화단과 질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현실을 외면하거나 무관심했던 당시의 미술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청년작가들이 외친 젊고 용감한 목소리는 혁신적이었으나, 그들의 아우성은 기성세력에 의해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들의 외침이 그저 소리 없는 아우성만은 아니었다. 10년 후 그들의 외침을 이어받은 청년작가들은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변혁을 일으켰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독재정권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진압하고 등장한 신군부정권 치하에서 민주주의의 쇠퇴를 지켜보던 청년작가들이 스스로 들고 일어선 것이다. 이들의 핵심적인 목표는 독재권력 안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순수주의 미술에 대한 비판과, 권력의 억압으로 소멸하고 있던 저항 미술, 프롤레타리아 미술, 리얼리즘 미술의 복권이었다.

더불어 청년작가들은 대중들과의 소통, 현실 비판, 민중 대변, 통일 운동 등 진보적인 활동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이루어 내고자 미술을 실천했다. 1979년에는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를 결성하여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젊은 작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최열 작가의 <감옥>이라는 작품과 홍성담 작가의 <파란 목도리 자화상>을 시작으로 미술의 운동성과 현장성을 주장했다. 이후에도, 1984년 서울의 <두렁>과 광주의 <일과 놀이>를 기획하며 민중미술을 발전시켜 나아갔다. 심지어 당시 민중미술을 외친 작가들이 힘을 합쳐 ‘애오개 미술학교’와 ‘시민미술학교’를 개설하며 작품 외적인 측면까지 노력했다. 이들은 이러한 활동의 축적을 통해 1980년대 한국 미술을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미술로 평가받도록 했다.

 

2018년 예술의 좌표는?

낭만주의, 신고전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우리는 미술사를 공부한다. 고흐는 인상파, 마티스는 야수파. 이리저리 구분하고 편을 나누곤 한다. ‘사진기의 혁명과 함께 찾아온 회화의 몰락’, ‘행위예술이 가져온 일상과 작품의 모호한 경계’등 여러 평론과 역사들은 쌓여만 간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옆에서 걷고 있는 청년 예술가들은 어느 편에 나뉘어 어떤 방향성을 가질까? 80년대까지 이어지던 이데올로기적 분쟁, 정치·사회적 발전에 대한 청년 예술가들의 진취적, 주체적인 외침은 이제 낭만으로 남아버렸다. 그렇다면 현재를 망라하는 미술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제가 함부로 얘기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작가 개인별로 다르죠.”

장진택 큐레이터는 “지금의 미술은 각개전투다.”라며 “작가들은 자기를 규정짓는 것도 싫어하고, 개별적 주체성이 강하다.”라고 말한다. 또 정중원 작가는 “미술 분야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양식이나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이 있는 시기는 끝났다.”라며 “이제는 모든 것이 개별화되어 있고 작가들은 각자 활동하며 개별적인 이야기만을 한다.”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과연 현재의 미술은 담론이 없는 껍데기만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바로크가 어울리는 시대가 있고 르네상스가 적절한 시대가 있듯, 지금의 시대에 어울리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혹시 청년작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개인적인 색깔이 지금 이 시대의 미술 담론이지 않을까. 어찌 아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지금의 미술이 훗날 가장 훌륭하게 평가될지.

*행위예술: 작가의 생각을 그림이 아닌 육체적인 행위를 통해 표현하는 예술

**동인: 어떤 일에 뜻을 같이하며 모인 사람

 

학생들의 자치적 전시 활동, 그 의의와 평은?

▲조형대학 소모임 ‘메씨랩’ 전시 장면
▲조형대학 소모임 ‘메씨랩’ 전시 장면

본교 미술대학과 조형대학 내 존재하는 학회와 소모임은 꾸준한 전시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조형대학의 ‘Messy Lab’은 이모티콘, 모델링, 아트토이 제작, 영상 등의 스터디를 진행하며 그들만의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소모임이다. 지난 학기 아트토이 페어에 참가하고 교내 전시를 진행했으며 서울 소재의 갤러리에서 소모임 단독 첫 전시를 열었다. 소모임 ‘Messy Lab’ 회장 이태범(프로덕트디자인3) 학우는 “소모임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크라우드 펀딩을 기획하는 중이다. 또한 소모임의 두 번째 단독전시와 아트토이 페어 참가 등을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아이디어에 접근하는 방식,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방법, 그리고 표현해내는 능력들이 자연스레 향상됨을 느낀다.” 라고 밝혔다.

▲회화과 학회 'YAHAM' 기획전시 포스터
▲회화과 학회 'YAHAM' 기획전시 포스터
▲장유리(회화2) 학우의 퍼포먼스 현장
▲장유리(회화2) 학우의 퍼포먼스 현장
▲정한결(회화4) 학우의 '마음소각장' 전시 장면
▲정한결(회화4) 학우의 '마음소각장' 전시 장면

미술대학 회화과의 전시·기획 학회 ‘YAHAM(야함)’은 ‘예술 한 잔: 못 다한 이야기’ 전시를 열었다. YAHAM의 학회원 장유리(회화2) 학우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는 관객참여형 작업을 통해 참여자들 간의 연대 형성에 중점을 두는 행위예술을 선보였다. 퍼포먼스는 놓인 꽃물 마시기, 초콜렛 먹기, 한지를 찢어 빨간 물에 담그기, 일몰 보기와 같은 소소한 행동에 불과하지만 작가는 이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과정으로 보고 참여자들에게 잊혀 가는 존재의 재인지를 유도한다. 참여자들이 위 행위를 통해 남긴 흔적들을 ‘기억하고 싶은 것’으로 인지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 다른 학회원 정한결(회화4) 학우의 ‘마음소각장’은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해소하는 가상의 공간을 형상화하고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을 시각화하였다. 또한 작가는 트라우마와 카타르시스에 대한 탐구를 중점으로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마음소각장’은 감정의 찌꺼기를 발산하여 카타르시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에서 책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한 편의 서사, 마음을 소각하는 일련의 과정을 담아낸다. 작가는 “방치했던 트라우마의 기억, 스트레스 등을 표출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통해 위로하고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시작했다.”라고 전했다.

위와 같은 학우들의 작품 작업 경향에 대해 판화과 김영진 교수는 “기성세대는 신세대보다 숙련된 기술이나 각종 데이터, 연륜을 가지고 있지만 굳어진 흐름 안에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어떤 새로운 것을 시도할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것을 유지하고, 그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젊은 세대들의 신선함은 항상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아직 작품에서 보이는 학생들의 생각이나 고민이 전부 비슷하다는 아쉬움이 있다.”라는 평을 내렸다. 이러한 점에서 학생들의 소모임이나 학회 활동을 통한 자치적인 전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 지난 기성세대가 이루지 못했던, 또는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도를 작품에 담아내는 것은 신세대인 청년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능력이자 경쟁력인 것이다. 학생들의 작품세계 논의는 교수의 크리틱과 평가를 받으며 완성하는 것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워졌다. 이는 ‘학부생’ 차원이 아닌 ‘청년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하고 자치적인 활동에 대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앞으로 그 중요성이 점점 더 할 것이다. 하지만  소모임이나 학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예술 활동에 있어 필수인 재정적 지원은 그들의 날갯짓에 무거운 추를 매달기도 한다. 본교의 학회 및 소모임 활동에 대한 지원은 그 규모가 매우 상이하다. 미술대학 회화과의 전시·기획 학회 ‘YAHAM’의 경우 학생회비와 학과의 실험실습비가 지원되며, 학회 지도 교수를 통한 외부 후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 조형대학 커뮤니케이션전공 소모임 ‘The team’의 경우 학교 차원의 재정적 지원이 없어 전시 비용을 모임의 구성원들이 모두 부담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조형대학, 안녕(安寧)하신가요..?

학우들은 학생으로서 학과 생활에 많은 시간을 쏟아 붓고 있다.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학우들에게 본교의 커리큘럼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교 미술대학의 교육 환경은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을까? 정중원 작가는 본교 교육 환경에 대해 “미술 분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학교로서 실력 있는 교수님과 좋은 커리큘럼이 갖춰져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학교의 시설과 환경이 미흡해 커리큘럼에 맞추어 작업을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라며 교육 환경의 부족한 점을 꼬집었다. 학우들 역시 교육 환경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먼저 수업 내용과 실제 작업 현장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는 지적이 있다. 장진택 큐레이터는 “인문학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예술학과뿐만 아니라 현장 작업이 중요한 미술대학의 타 학과 모두 현장과의 괴리가 최소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현장에 대한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수업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미술대학 전체적으로 현장과의 괴리를 줄일 수 있는 커리큘럼이 보강되었으면 한다.”라며 현 커리큘럼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커리큘럼 외 명사 초청을 통해 현장 지식을 배우는 학우들이 느는 추세다. 한편, 입학전형 변화에 따른 커리큘럼의 변화가 미흡하다는 평가 또한 존재한다. 서울캠퍼스 미술대학 조소과 유아연(조소3) 학우는 “본교 미술대학은 입학전형을 실기에서 비실기로 변경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이에 따른 커리큘럼 변화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비실기 전형으로 입학한 학우들은 불필요한 수업을 수강하게 된다.”라며 커리큘럼 변화를 촉구했다.

미술대학 커리큘럼은 기술·실무적인 내용보다는 ‘작품 세계’ 혹은 ‘시대적 예술적 가치’ 등과 같이 다소 포괄적인 예술의 가치 실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조형대학은 커리큘럼은 구체적인 ‘실무 능력’에 집중하고 있다. 조형대학은 지난 2017년 대대적인 학부 개편을 진행하며, 영상과 디자인이 합쳐져 있던 기존 커리큘럼을 각각 분리하는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세종캠퍼스 조형대학 서동수 학장은 “과거에는 영상보다 디자인에 대한 수요가 많아 디자인 수업이 많았고, 이 때문에 영상과 애니메이션 수업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었다.”라며 “커리큘럼 변경을 통하여 학우들의 수요를 반영하였다.”라고 말했다. 전공 분리뿐 아니라 전공이 융합되는 변화도 일어났다. 조형대학은 기존 디자인 전공인 △디지털미디어디자인전공 △프로덕트디자인전공 △커뮤니케이션디자인전공 커리큘럼간 유사점에 착안하여 이를 하나로 융합한 디자인컨버전스학부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변화에 많은 학우는 긍정적인 평가를 보냈다. 커뮤니케이션전공 학생회장 윤우진(커뮤니케이션3) 학우는 “디자인 경향에 맞추어 디자인적 사고를 요구하는 수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부분이 디자인컨버전스학부 체제에서 추가되었다.”라며 변화된 커리큘럼에 만족감을 표했다. 하지만 변화된 커리큘럼에 모든 학우가 만족한 것은 아니다. 기존 커리큘럼에는 영상·영화전공과 애니메이션전공은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합쳐지면서 세부적인 내용을 담은 전공 수업 몇 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캠퍼스 별로 상이한 교육 현장에 대해 김영진 교수는 “학우들의 과에 따라 진로가 무조건적으로 결정된다고 단정 짓기 힘들다.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기에 다른 과와의 교류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라며 양 대학 간의 교류가 필요함을 알렸다.

그렇다면 본교 시설은 안녕한가? 이것만은 즉답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중원 작가에 따르면 과거부터 미술대학 환경 개선을 위한 학우들의 요구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미술대학은 작업 공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유리(회화2) 학우는 “2017년 미술대학 학생회의 요구에 따라 서울캠퍼스 F동 리모델링을 완료했지만, 여전히 실기 공간이 좁아 리모델링 실효성에 의문을 표하는 학우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조형대학 역시 시설과 기자재 부족으로 학우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형대학 건물 세종관 내 작업 공간인 커뮤니티실이 층별로 분포되어 있으나 많은 학생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강의실은 사전 대여 신청한 학생들만 사용할 수 있어 대여 경쟁률도 높기 때문이다. 

 

사회생활 만렙, 늙은 청춘입니다 

거대 규모 홍익예술인들 사이에서 인싸로 살아남기 

 

'인맥 넓으면 좋지.’

 

틀린 말이 아니다. 대학에서 만난 학우와 교수들은 서로 간에 훌륭한 작업환경을 제공한다. 서울캠퍼스에서 다수의 학과와 학우들을 둔치고 있는 본교 미술대학은 타 학교 여느 미술대학보다 월등히 큰 규모의 인원을 보유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미술대학은 5개의 전공단위에 각 30명 안팎의 인원을 두고 있다. 한편 본교는 11개의 세분화된 학과·학부에 각 30명에서 200명까지의 인원을 한 학년에 아우르고 있다. 이에 더불어 현재는 다소 상업화된 서울캠퍼스 정문 앞의 ‘홍대 거리’는 2000년대까지도 갤러리와 표구사, 화방 등의 미술 관련 인프라를 단단히 지탱해왔다. ‘서울캠퍼스는 좁아 보이지만 사실 홍대 거리 전부가 캠퍼스야.’라는 등의 농담이 오가기도 했다. 많은 인파와 청년들 사이에서는 누구나 다양하고 많은 학우들과 교우하며 함께 예술을 무궁무진하게 논할 수 있다. 같은 수업을 듣고 좁은 실기실에서 우글우글 부대끼며, 은근한 긴장감 조성까지 더하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누구나 소위 ‘인싸(Insider)’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수많은 사람들 중 두어 명이 도태된들 별일일까? 누구도 인싸가 될 수 있다면, 누구도 ‘아싸(Outsider)’가 될 수 있는 법. 인력의 장, 파격적인 네트워크로 작용할 수 있는 이 거대한 인파는 어디선가 누군가의 발등을 찍고 있을지 모른다.

 

‘같은 학년, 학과에서 4년 동안 다녔는데, 이름도 모르네요.’

‘자네가 내 수업을 들은 적이 있나?’

 

다자녀 가정에서는 자녀 1명에게 가는 손이 덜 하듯이, 100명 내외의 인원은 도저히 한 명의 학생에게 교육 환경의 섬세한 손길이 닿기 어렵다. 이렇다 보니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돋보여 작가로서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긴장감이 극대화된 일종의 ‘서바이벌 체제’가 시전되기도 한다. 학생 신분으로 공부를 하는 동시에 거대 무리 속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학교생활이 아닌 ‘사회생활’을 자처하는 학우들의 모습은 보일 듯 보이지 않게 우리 곁에 스며들어 있다.

 

“대학에 인맥 쌓으러 온 사람은 최악이에요. 대학 교육이 겨우 그 정돈가요? 제일 자유롭고 진취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는 예술가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작업할 노력은 없이 그저 술자리에서 교수들, 원로들 떠받치느라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면 정말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예술계에서 예술가의 영향력은 작품 값에 비례한다.’ 이는 사실 예술계에서 이미 불문율로 보편화된 원리이다. 아직까지 컬렉터, 대중들에게는 찢어진 셔츠에 수염이 무성한 이른바 ‘중후한 원로 화가’에 대한 기대가 잔존한다. 멀끔히 빳빳한 셔츠를 입고 있는 청년들에게는 과연 얼마만큼의 기대를 걸어줄까. 대중들의 시선만이 청년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 청년세대는 기성세대의 자본에 기생하지 않으면 자생할 수 없어요. 90년대에는 서울캠퍼스 앞 푸르지오 상가에 작업실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아무리 학교에 작업 공간이 부족해도 학생들이 학교 근처에 작업실 갖기는 어렵죠. 얼마나 비싼데요.” 정중원 작가는 더욱더 열악해진 청년들의 경제구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늘날 청년들은 기성세대 품 안의 어린아이들과 같이 열정과 젊음을 팔아 경험과 자본을 빌어먹고 산다며 평가절하를 당하기도 한다. 이에 기성세대는 자본과 배움의 시혜자로서, 청년세대를 ‘기생하는 계층’으로 여기며 우쭐하는 태도를 보인다. 청춘들은 결국 기성세대의 경제력에서 자립하지 못한 채로 끝없는 노력만을 요구받으며 현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사회’인 대학 사회에서, 작품 활동을 효율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한 인맥 농사가 과연 아무 수확 없는 간신질이라고 모두가 당당히 비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청년들은 과연 성실한 예술 연구와 작업만으로 사회의 단물을 온전히 빨아먹을 수 있을까?

그래도 청춘입니다 

맨땅에 헤딩해도 아직은 아프지 않습니다 

 

학생은 계획 없이 모든 걸 시도해도 괜찮아요. 아무리 처절하게 실패해도 또 다른 실패가 권장되는 때랍니다.

학부를 졸업한 많은 동문들에게 학창시절은 굉장히 소중한 기억으로 여겨지곤 한다. 동문들은 여느 불이익이나 명예 실추에 대한 시달림 없이 모든 시도가 장려된다는 학생들만의 특권이 부럽다고 말한다. 장진택 큐레이터는 “요즘 청년들은 청년답게 살지 않는 것 같다.”라며 “미래에 대한 체계적인 계획이 이미 머리에 가득 찬 친구들이 많다. 주변의 시선이나 환경에 너무 신경을 기울일 필요 없이, 어느 때보다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학생 시절만의 특권을 스스로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서동수 학장은 “지도할 때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학생들이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가의 1번 자세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학생들이 관람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착한’ 작업이 아닌 조금 더 자신의 작품관을 따른 작품을 만들어낼 것을 기대한다며 학우들을 격려했다.

현세대에는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를 다루는 예술담론이 증가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청년들은 오늘날에도 고루한 권위와 인식의 반대편에서 지속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있다. 최근 화제 되는 퀴어 운동, 미투 운동 등,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고착화된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목소리의 중심에는 기성세대가 아닌 20대 전후의 청년들이 서 있다. 정중원 작가는 “여성인권과 동성애자 인권 운동은 일제강점기 30년, 군부정권과 같이 특정 악의 권력에 대한 반항이 아닌, 수만 년 전부터 뿌리박혀온 성적 혐오와 차별에 대한 대항으로, 그 어떤 역사 속 운동보다 어렵고 위대한 운동이다.”라고 전했다.

청춘들은 기성세대에 기생하는 청년 세대로서, 현 세태 나름의 척박한 환경 속에 방황하고 있다. 어쩌면 젊음의 목소리를 펼치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유롭게 앞서 나가야 할 예술가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정치·사회적인 거대 담론으로, 때로는 개개인의 깊은 내면으로. 예술가들은 이 세대를 사는 누군가의 머리와 가슴속에 있는 어둠을 발 벗고 꺼내어 펼쳐내어야 한다. 척박한 땅에서도 꽃은 핀다고 하지 않는가. 꽃으로 피어날 예술가들이 견뎌내야 할 토양의 척박함은, 그들에게 항상 역설적으로 주어지는 저주이자 특권일지 모른다.

 

홍준영 기자(mgs05038@mail.hongik.ac.kr)

박성준 기자(gooood82@mail.hongik.ac.kr)

우시윤 기자(woosy0810@mail.hongik.ac.kr)

이소현 기자(sohyun0911@mail.hongik.ac.kr)

천지예 기자(jiye1108@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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