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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과 피의 공생(共生)기

8%가 선사하는 다채로운 기적, 피(B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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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버릇없는 아이에게 곧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라고 꾸짖는다. 그럼 아이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치기 어린 대꾸를 한다. “머리에 피 마르면 죽거든요?” 그 대답은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우리로 하여금 피식, 실소를 짓게 만든다. 실제로 인간은 체내에 혈액량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혈액은 인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운반해 배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피는 체내 다양한 생리현상에 관여하고 있다. 이렇듯 몸속에서 많은 일을 하는 피는 몸 밖에서도 여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고작 내 몸의 8% 밖에 되지 않는 이 붉은 액체가 사회에서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피, 다양한 관념으로 자리 잡다

고대 자연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B.C.504~B.C.43 3)는 ‘4원소설’을 주장하며 인체의 사유(思惟) 작용은 신체적 기능이며 혈액이 바로 그 중추라고 주장했다. 그는 혈액이 4원소 모두를 포함하며 생활력과 정신을 보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엠페도클레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피가 인간의 정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손등에 피를 낸 뒤, 이를 맥주에 섞어 마시며 정신을 공유한 의형제의 언약을 맺는 ‘카센디’라고 하는 의식이 존재했다. 고대 유대인들 또한 피가 인간의 정신을 나타낸다 여겨 인간의 혼과 동물의 혼이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피를 모두 뺀 고기만을 먹었다고 한다.

또한 피는 인간의 생사(生死)에 큰 영향을 주어 예로부터 ‘생명’을 상징했다. 고대 그리스의 명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460~B.C.377)는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에서 기인해 인체 건강과 질환을 4가지 체액(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조화와 이상에서 비롯된다는 ‘체액 병리설’을 주장하였고, 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나쁜 피를 뽑는 ‘사혈(瀉血)’을 제시했다.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체액 병리설은 오론(誤論)으로 밝혀졌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사혈로 간단한 병을 다스리곤 한다. 한편, ‘부족한 것을 채운다’하여 빈혈이나 혈우병 환자에게 인간의 피를 마시게 하는 단순한 치료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또한 피는 치료를 넘어 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고대 로마에서는 회춘을 위해 젊은 검투사의 피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생명을 상징한 피는 그 상징성을 인정받아 신에 대한 제물의 역할을 하며 종교적 의미까지 확장되었다. 고대 멕시코에서는 ‘인신공희’의 일환으로 매년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피와 살을 신에게 공양하며 세계의 안정적 운행을 기원했다. 샤머니즘에서는 지금도 가끔 인간의 피를 제사에 직접 사용한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피는 지금까지 다양한 관념적 의미로 인간사에 자리매김했다.

 

피, 인간을 나누는 잣대가 되다

계급사회가 시작되자 인간은 피에 등급을 매겨 각자의 권리에 차등을 두기 시작했다. 즉 혈통을 기준으로 한 신분제가 나타난 것이다. 신라의 골품제도, 인도의 카스트제도 등은 생활 전반에 걸친 혜택과 권위가 통제되어 신분의 차이가 점점 명확해졌다. 혈통은 같은 피를 공유했기 때문에 권력이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이 명분은 점차 순수한 혈통만을 선호하고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이는 것을 배척하는 ‘순혈주의’로 이어졌다. 순혈주의는 과거 왕실의 근친혼 등을 야기했다. 특히 유럽의 왕가는 각자의 권력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가까운 친인척과의 혼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흐른 뒤 발생했다. 오랜 기간 근친혼이 유지되면, 다른 혈통에 의해 해당 혈통의 유전자가 희석되지 않아 열성인자 발현 등 후손에 유전병을 물려줄 확률이 높아진다. 대표적으로 왕가의 병이라 불리던 유전병인 ‘혈우병’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Victoria, 1819~1901)에게서 시작되어 그 자손들에 의해 유럽의 여러 왕실로 퍼져나갔다. 또한 이 병은 영국 왕족에서 그치지 않아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인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로마노프가의 황제 니콜라스 2세(Nicholas II, 1868~1918)와 혼인하여 외동아들인 알렉세이 황태자에게 혈우병을 물려주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불치병은 부모의 판단력을 흐렸고, 이는 러시아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다른 피에 대한 배타심이 이토록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순혈주의는 모습을 바꾸어가며 사회에 나타났다. 20세기 초 순혈주의는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의 ‘나치즘’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이는 아리아인을 제외한 다른 인종들을 학살하기에 이르는 등 극단적 모습을 보였다. 한편 독일의 우생학자들은 진짜 ‘피’로 순혈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1901년 오스트리아 병리학자 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에 의해 혈액형이 발견되자 우생학자들은 이를 이용해 자신들이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고, 1910년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에밀 폰 둥게른(Emile von Dungern, 1867~1961) 박사는 한 논문을 통해 A형인 게르만 민족이 B형인 아시아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순혈주의는 단순히 피의 보호를 넘어 인종차별로까지 번지며 인간을 나누는 하나의 잣대가 되었다.

 

피, 예술의 영감이 되다

이렇듯 여러 모습을 가진 피가 한편으로는 예술가에게 다양한 해석의 길을 열어주는 매력적인 피사체로 자리매김한 경우도 있었다. 영국의 현대 미술가 마크 퀸(Marc Quinn, 1964~)은 1991년 자신의 피를 뽑아 두상을 만든 작품 <셀프, Self>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5년마다 한 작품씩 제작하는 연작인 <셀프, Self>는 단순한 자화상이 아니었다. 4.5L의 피로 만든 두상은 특수 냉동장치에서 항상 영하 15℃를 유지해야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냉동장치가 꺼진다면 작품은 이내 녹아 그 모습을 잃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한 수집가의 손에 들어간 이 작품이 갤러리 관리인의 실수로 장치의 코드가 뽑혀 일부가 훼손된 적이 있었다. 이 작품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마크 퀸은 1991년 첫 작품을 내며 작품의 주제가 ‘생명과 죽음’이라고 했다. 생명은 특정한 환경에서 존재하고 그 환경이 유지되지 않으면 죽음을 맞는다. <셀프, Self>는 생명 그 자체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팝아트 작가 김지훈도 피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통해 작품을 만들었다. 자신의 피를 뽑아 물감으로 만들어 스타의 초상을 그린 그는 ‘매혈(賣血)’을 해서라도 성공하려 하는 현대인의 극단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피 자체의 자극적인 가치에 매료되어 작품을 만든 예술가도 있다. 설치미술가 장지아는 지난 2013년 도축된 소 한 마리의 피로 만든 여러 오브제들과 그 제작 과정을 기록한 작업으로 구성된 <The Reason Is You>를 발표했다. 사회적으로 금기된 몸의 내적 영역을 미적 대상으로 삼아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녀는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피가 냄새나고 더러운 하나의 ‘사물’로 대체되는 과정을 시각과 후각적 자극을 통해 대중에게 드러냈다. 미국의 필 핸슨(Phil Hansen, 1981~)은 자신의 피로 북한의 고(故)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초상화를 그린 작품 <피의 가치(Value of Blood)>(2007)를 선보였다. 그는 피를 작품의 재료로 사용한 것은 자극적 소재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여 더 많은 미국인들이 북한의 실상에 관심을 가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피, 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구나

피는 인간의 삶에 있어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그래서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헌혈은 그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래서 헌혈은 건강한 사람이 자유의사에 따라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의 혈액을 사회에 기증하며 생명을 나누는 고귀한 봉사 행위라고 불린다. 헌혈된 혈액은 장기간 보관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꾸준한 참여가 필요하다. 그러나 요즘 일부 매체의 유언비어로 인해 헌혈 빈도가 계속 낮아지고 있는 상태다. SNS를 통해 번지는 유언비어는 ‘헌혈을 하면 에이즈에 감염될 수도 있다’, ‘헌혈을 하면 혈관이 좁아진다’등 근거는 없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헌혈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주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 현상으로 건강한 피를 제공할 수 있는 젊은 세대의 수가 줄어든 것도 혈액 부족 사태의 원인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만성 혈액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건강한 피의 가치가 점점 높아져 한편에서는 암암리에 매혈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헌혈증서는 혈액관리법에 의해 매매가 금지되고 있지만 익명 커뮤니티를 통해 거래가 오가기도 하며 심지어 지난 2016년에는 환자의 혈액을 외부로 빼돌려 이익을 취한 병원 직원이 적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한적십자사는 헌혈자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헌혈증서와 영화예매권 등 각종 물품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타인을 위한 헌신인 헌혈이라는 대의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혈액 값을 높이는 요인이지만, 헌혈자 확보를 위해서 이런 유인책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매 분마다 지구 2바퀴 반이나 되는 혈관을 도는 피는 몸 바깥에서 다양한 역할들을 돌고 돌아 어떤 이에게는 단지 영화 티켓 하나로, 어떤 이에게는 한 줄기 빛으로 도착할 것이다. 지금 당신에게 검붉은 피 한 방울은 어떤 의미로 도착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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