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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정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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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도 국정감사에서 사립유치원 회계 비리와 서울교통공사 고용세습 의혹이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사이에 ‘청와대 정부’는 국회의 의사와 관계없이 남북한의 관계를 단독 처리함으로써 남북합의서 비준 절차의 정당성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3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9월 평양공동선언’과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서명비준한 것이 그것이다. 이로써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 없이 이를 비준한 것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가 법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와 북한 당국간에 문서의 형식으로 체결된 모든 합의를 남북합의서라고 한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이해한다. 이에 따라 남북합의서는 한민족공동체 내부의 특수관계를 바탕으로 한 당국간의 합의로서 남북당국의 성의있는 이행을 상호 약속하는 일종의 공동성명 또는 신사협정에 준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남북합의서는 법률도 아니고 조약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은 수정되어야 한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은 남북이 서로 상대방의 국가성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남북합의서는 남북의 특수관계에 상응하는 특수한 성격의 조약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특수성은 한민족공동체의 일부를 이루는 국가들 간의 조약, 즉 남북의 특수관계에서 내부관계를 규율하는 조약이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평양선언과 군사합의서는 현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한, 강화조약의 준비단계에 해당하는 특수한 성격의 조약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특히 군사합의서를 비준하기 전에 헌법 제60조 제1항에 따라 국회의 동의를 얻었어야 했다.

이는 군사합의서의 조약성을 부정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헌법이 제60조 제1항에서 일정한 조약의 비준에 대해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조약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조약의 내용이 공동체의 존립 및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직결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항은 입법사항으로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법률로써 규정하는 것이 민주적 법치국가의 원칙이므로, 대통령이 이를 조약으로 체결·비준하는 경우에 국회의 사전 동의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 제60조 제1항의 유추해석의 결과, 강화조약의 준비단계에 해당하는 군사합의서는 비준에 앞서 국회의 동의를 얻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적 정당성이 이원화되어 있는 대통령제 정부형태에서 군사합의서에 대해 여소야대 관계가 형성된다면, 대통령은 비준의 정당화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경우에 대통령은 헌법 제72조에 의거해 군사합의서 비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쳐 국민의 총의로써 국회, 특히 야당을 정치적으로 압박할 수 있지만,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때에는 오히려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이것은 대통령제에 내포되어 있는 민주주의의 치명적 자기모순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이리 상태, 인간이 대량학살의 대상이 되고 수단이 되는 야만과 폭력의 전쟁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존중되는 항구적 평화상태로 이행하는 것은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일 뿐만 아니라 이성의 명령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통령이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헌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언제나 목적과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 즉 내용과 형식의 정당성을 모두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정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변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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