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10.8 화 17:19
상단여백
HOME 문화 오색찬란
생의 마지막에 만나는 또 다른 공간, 무덤죽음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그러나 무덤은…?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어야 이이제” 과거 상여를 메고 장지(葬地)에 사자(死者)를 묻으러 갈 때 상여꾼들이 부르던 장송곡의 한 소절이다. 친인척들은 구슬픈 장송곡 가락을 들으며 장지로 올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후 그의 마지막을 기념한 장지는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이 그를 추억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가 된다. 그 곳이 바로 무덤이다. 인간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에 무덤 또한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언젠가 내가 돌아갈 자리인 무덤이 인간사(人間事)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을지 알아보자.

 

변화되는 사회, 그 속에 계속되는 무덤의 변모(變貌)

동양 역사 속 최초의 무덤은 약 1만 8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북경(北京)부근의 주구점(周口店) 상정동유적(上頂洞遺蹟)으로, 발견 당시 석기, 골각기, 동물의 뼈 등과 함께 화석 인골이 출토되었다. 이에 학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생활공간 한 구석을 간단히 파고 시체를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처럼 계급 사회가 시작되기 전 인류는 생활 전반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흑, 돌, 널, 토기 등을 이용해 사체를 묻고 처리하는 물리적 과정에 집중해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사람들 간에 신분 차가 생기고 그에 따라 생활양식이 달라지자 무덤의 모습 또한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예로 우리나라 기준 청동기 시대부터 발견된 고인돌을 들 수 있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불리는데, 형태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분류되지만 대개 사체를 묻은 묘실 위에 거대한 돌을 세운 무덤을 일컫는다. 고인돌은 과거 기술력으로 추측했을 때, 축조 당시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예상되어 당시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지배계급의 물품이었던 비파형 동검의 파편이 발견된 사례는 해당 주장에 힘을 싣는다. 또한 크고 웅장한 고인돌의 모습을 통해 당시 우두머리였던 사람들이 무덤의 크기나 매장품을 이용하여 자신의 신분을 과시했음도 추측할 수 있다. 

지배자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방법은 물질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과거 존재했던 ‘순장’은 어떤 죽음을 뒤따라 다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임을 당해 주된 시체와 함께 묻히는 장례 습속이다. 순장은 대개 지배계급이 신하와 아내 등 피지배계급에게 강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습속은 계급이 뚜렷이 나뉘었던 초기 고대문명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파라오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는 축조에 동원된 사람들을 완성과 동시에 무덤 내부에 함께 묻었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피라미드의 속설에 대해서 확정된 바는 없지만 실제로 고대 이집트 제르왕의 묘 둘레에 후궁과 노비를 순장한 묘가 발견되어 당시 순장 습속이 일부 성행했다는 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일각에서는 진시황릉 내부에서 발견된 수많은 병마용들이 순장의 변화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순장된 유골은 오늘날 매장자의 신분 확인과 역사 고증의 중요한 역할로 사용되기도 한다. 없어져야만 했던 비극이 과거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는 사실은 무덤과 죽음이 남긴 하나의 역설임이 틀림없다. 

과시의 상징이었던 무덤은 현대에 들어 그 입지가 좁아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 이유로 인해 이러한 현상이 크게 두드러졌다. 일제 강점기 이후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해 유아와 청년 사망률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화장(火葬)시설과 정부 부처의 주먹구구식 대처에 의해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공원형 공동묘지가 설치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구잡이로 생긴 공동묘지에 혐오감을 드러내며 님비(Not In My Back Yard)현상을 일으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거 추모와 신분 과시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무덤이 애물단지 혐오시설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무덤

무덤은 단순히 죽은 자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크리스트교인들의 고대 지하 무덤으로 알려진 카타콤(Catacombs)은 바위를 대충 다듬어 만든 그들만의 공동 묘지였다. ‘육신은 언젠가 부활한다’라는 관습에 의해 화장(火葬)을 지양하는 기독교 문화에 따라 그들은 지하에 수많은 통로와 방을 만들어 수천 개에 달하는 지하 무덤을 만들었다. 이 카타콤이 유명해진 계기는 크리스트교가 박해를 받았던 로마시대에 많은 교인들이 그 곳으로 숨어 들어가 목숨을 연명하고 예배당으로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인간이 시체에서 발생하는 유독가스가 퍼져 있을 지하 무덤에 오랜 기간 머무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현대적 해석이 밝혀졌지만 지금도 카타콤은 순례 장소로 많은 크리스트교인들이 찾고 있을 만큼 그 의미가 깊다. 

더불어 무덤은 고인(故人)에 대한 추모 자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재난, 학살 등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 그 공간이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추모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의 9.11 추모공원이 있다. 미국은 2001년 발생한 대규모 항공기 테러 사건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2,700여 명의 피해자들을 위해 당시 무역센터가 위치했던 공간에 추모공원과 박물관을 건립했다. 사람들은 이 장소를 통해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자들을 기억하며 추모하고 있다. 

한편, 무덤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는 인도의 타지마할이다. 타지마할은 17세기 무굴제국의 황제였던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총애하던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 1593~1631)을 추모하기 위해 건축한 궁전 형식의 묘지이다. 이는 순백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찬란한 빛깔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빼놓기로 유명한 예술 건축물이다. 이러한 무덤 양식은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파리 20구의 페르 라셰즈 묘지(Pere Lachaise Cemetery)가 그 예이다. 페르 라셰즈 묘지는 무덤을 둘러싼 아름답고 섬세한 조각들과 잘 가꿔진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관광객들에게 인상 깊은 유적지로 각광받는 명소이다. 또한 이는 서양에서 유행했던 정원식 묘지 양식을 잘 보존한 사례로도 유명하다.

 

세상에서 가장 사실적인 박물관: 한 인간을 넘어 한 세대의 이야기를 전달하다

무덤은 매장자가 살던 시대를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박물관이기도 하다. 과거 사람들에게는 피장자의 사후 삶을 위해 그가 살아생전 지녔던 옷가지, 패물, 생활 용품 등을 함께 묻었던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습과 그 물건을 ‘껴묻거리’라고 한다. 껴묻거리는 77000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시대부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시대에 따라 매장자가 사용한 물건이 달라졌기 때문에, 껴묻거리는 직접적으로는 고분편년의 자료로 사용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 변동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동일한 시기에 살던 피장자의 신분이나 직업에 따른 부장품의 차이는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을 추론하는 근거가 된다. 한편 무덤 내부에 그려진 벽화와 유려한 장식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 추측도 가능하다. 고구려에서는 매장자의 일상 중 기념할 만한 사건이나 생전 풍요로웠던 생활상을 그려 넣고, 무덤 내부에 기둥이나 들보 등 목조 가옥의 골조를 그려 넣어 죽은 이의 생전 자택처럼 보이게 무덤을 꾸몄다. 당시의 고분 벽화는 고대 회화의 제작과정, 표현기법, 수준, 안료 및 아교 제조술 등으로 당시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외에도 글로는 알 수 없었던 고대 사회의 생활 풍속, 신앙, 종교, 사상 등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어 사료(史料)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우리 삶의 끝에 머물러 있는 무덤은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바꿔가고 있지만,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에서 그들이 서로를 기억할 수 있도록 사자(死者)의 육신을 보관하는 본질적 역할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체 안치가 주민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조성한다며 무덤을 ‘혐오시설’로 칭하며 기피하고 있다. 오늘날의 무덤은 문화적, 예술적 공간으로 탈바꿈하며 부정적 인식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간의 마지막을 추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무덤을 기피하는 작금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재고해봐야 할 시점이다.

김성아 기자  becky0602@mail.hongik.ac.kr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