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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 버릴지라도 다시 한 번, 『천마총 가는 길』(1988)칼과 피의 역사가 남긴 부드러운 곡선이 주는 위로

내리쬐는 햇볕에 기자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창밖은 8월의 무덥고 찝찝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이야 그 더운 공기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지만, 기자가 경주에 갔을 때만 하더라도 여름은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뽐내고 있었다. 경주로 떠난 여행은 오랜만에 가는 가족 여행이었다. 짐을 한가득 싣고 올라탄 차에서 ‘여행’이라는 말이 주는 오묘한 설렘에 다들 마음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기자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계속되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부터 나섰던 여행길이었기에 가족들은 모두 피곤한 상태였다. 한참 잠을 자던 중 창밖에서 들어오는 따가운 햇볕에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경주 톨게이트가 보였다. 경주는 톨게이트마저 가히 ‘경주’다웠다. 영준과 그의 가족은 어떤 마음으로 톨게이트를 지나왔을까? 『천마총 가는 길』의 주인공 영준은 그의 아내와 딸 한별이를 데리고 이곳, 경주로 여행을 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묘를 이장해 받은 보상금을 들고 떠난 이 여행은 단순히 즐거운 가족 여행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영준의 마음 한 구석에는 몇 년 째 치유되지 않던 상처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여행이 상처에 대한 치유가 되기를 기대하며 이곳에 왔다. 과연 그는 천 년의 역사가 담긴 경주에서 그 상처를 아물게 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까?

 

이 종은 현재도 아침저녁 예불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원래 지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을 위해 두드리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종입니다….

 

불국사는 이방인들로 붐볐다. 더운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노인들, 무더운 날씨에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연인들.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사진을 찍기 바빴다. 석조계단 앞 나무 그늘 밑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기자와 가족들은 자하문을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높이 솟아 고고한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사진 찍기 싫어하는 딸 때문에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가족이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탑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을 영준의 가족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두 개의 탑을 지나 조금 걸으니 범종(梵鐘) 하나가 보였다. ‘이고득락의 종’이었다.

이고득락(離苦得樂), 인간세상의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는다는 뜻이다. 1980년 6월은 고문자들의 폭력이 정당화되던 어둠의 시대였다. 당시 여성잡지 기자였던 영준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끌려갔다. 수차례 이어진 고문으로 그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죄를 자백하게 된다. 이후 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나지만 이 끔찍한 고통은 임신한 아내의 유산으로까지 이어지고 만다. 그는 군사독재 시대가 주었던 고통을 평생 껴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영준은 그가 받았던 끔찍한 고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그에게 이고득락은 무엇을 의미하였을까. 기자는 잠시 범종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삶은 땅의 소실과 함께 완전히 변모되었다. (중략…) 우물과 땅은 아버지에게 같은 의미였음을 나이가 들면서 어렴풋이 알아차리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안겨준 가난의 공포까지 너그럽게 이해해버리지는 못하였다.

 

분황사 입구 앞에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파란 하늘에 꽃들은 만발해있었고 저 멀리엔 청록색의 나무로 가득 차 있는 산들이 보였다. 기자는 이 풍경에 햇빛이 조금만 약했더라면 좀 더 좋은 그림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들어간 분황사는 매우 한산했다. 매점에는 아주머니 한 분이 여름이 지겹다는 듯 부채질을 하며 앉아계셨고, 나무그늘 밑에서는 할아버지가 졸고 계셨다. 눈을 돌리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분황사 모전석탑이었다. 그 옆에는 행과 열을 맞춰 연등이 매달려 있었고, 형형색색의 연등과 무채색의 석탑이 어우러진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탑 옆에는 메마른 우물이 하나 있었다. 영준이 이곳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우물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 우물의 물을 떠다 마시며 ‘아버지의 우물’을 떠올렸으리라. 영준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광복이 되기 전까지 일본에서 일을 하며 한국의 땅을 사들였다. 그러나 광복 후 토지개혁으로 땅을 모두 빼앗겨 월남을 하게 되고 그때부터 아버지는 소위 ‘죽은 사람’과 같은 삶을 보냈다. 아버지는 항상 집에 머물며 빼앗긴 땅과 그곳에 놓인 우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준은 가족을 가난으로 내몰았던 무책임한 아버지를 매우 증오하였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슬퍼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영준은 훗날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준 가난이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다. 영준이 그의 가족에게 준 고통이 고의가 아닌 단지 시대의 잘못이었을 뿐인 것처럼.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새롭게 시작할 수 없을까. 저들의 백마는 마지막 지평선에서 하늘로 날아가 버릴지라도, 그는 바로 이 땅에서 끝까지 엉겨 붙어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이 땅에서, 다시 한 번만….

 

수많은 죽음들이 깃들어 있는 능을 지나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죽음이 머물러있는 천마총이었다. 무더위를 피해 천마총 내부로 들어가자 시원한 공기가 기자를 반겼다. 천마총 중심은 무덤의 주인이 묻혀있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살아생전의 삶을 자랑하기라도 하는 듯 화려한 금관과 금띠들이 쌓여 있었지만 정작 육체는 부슬부슬한 흙이 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것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천마총을 한 바퀴 돌던 기자는 한 마리의 말이 그려진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천마도였다. 땅을 지배하려는 자들이 왜 하필 날아가는 말을 그렸을까? 땅에 대한 허무를 느껴 이 땅을 떠나고 싶었던 것일까? 영준도 그런 생각을 하였다. 영준이 천마도를 보며 떠오른 생각들은 오히려 그를 굳세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은 끝까지 이 땅에 붙어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감싸던 시대의 고통과 슬픔들이 삶을 억누르더라도 이 땅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다짐했으리라.

 

칼의 피의 역사라 하여도 천년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저렇게 부드러운 곡선으로 남는 것이었다. (중략…) 아이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약간 웃어주었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정성을 다하여서, 셔터를 눌렀다.

백반 집 주인 아주머니의 추천으로 떠나게 된 경주에 도달했을 때, 영준은 ‘이 여행이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것이 아닐까’라는 이상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경주라는 도시가 영준과 매우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천 년 전 수많은 파괴와 폭력의 고통을 겪은 경주처럼, 그의 삶도 마찬가지로 고문과 폭력이라는 공포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 이전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에게 경주는 부드러운 능선들을 보여주며 위로의 손을 건넨다. 시간이 흘러 피도, 공포도 사라져버린 능선의 곡선은 흘러가는 시간이 주는 치유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영원할 것만 같던 고통도 결국 부드러운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말이다.

영준은 천마총을 나와 알 수 없는 두통과 함께 자신의 가족을 떠올린다. 과거 그의 아버지는 시대의 고통 속에 절망하며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영준은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는 듯 갑자기 천마총을 가리키는 표지판 앞에서 딸아이의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어느 것도 다치지 않고 어느 것도 치우치지 않은, 온전한 사진을 담고 싶었다. 문득 사진이란 것이 그 찰나의 장면을 담는다는 것보다, 그 순간을 찍는 감정과 정성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는 능 사이로 앞서 걸어가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매일 보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복잡한 마음이 물씬 밀려왔다. 기자는 카메라를 들어 그들을 찍기로 했다. 어느 것도 치우치지 않고 온전하게, 찰칵-.

우시윤 기자  woosy0810@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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