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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시간 3년, 바보야 매듭을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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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된 시간. 아니, 사실은 붙들려 버린 시간이다. 기획서 마감을 위해 달리는 하루, 기사 마감을 위해 달리는 일주일, 그리고 이곳 S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리는 3년. 우리는 이 한정된 시간을 붙잡기 위해, 아니 벗어나기 위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이곳에서 울고 웃어왔다. 기자가 이곳 기자실에서 근 2년간 한 짓이라고는 지금과도 같이 이 건조한 노트북을 쉴 새 없이 두들겨 팬 것밖에는 없는데, 왜 기자의 뇌리에 떠도는 것은 손가락의 굳은살이 아닌 감정과 추억이란 말인가.

대학생활 4년 중 3년. 이 길고도 짧은 기간을 맞이하고자, 어떠한 묵직한 짐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 채 우리 모두는 순진하게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역시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막연하고 묵직한 응어리를 마주하게 되며, 그럼에도 우리들은 ‘감옥’같은 이곳을 탈출하지 못하고 3년의 수감생활을 모두 마치곤 한다.

‘남는 사람이 바보가 되면 안 된다’, ‘그래도 동기 때문에 남는다’. 매주 기자실에서 기자라는 사람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 비틀린 어구들을 반복해 내뱉는다. 기사에서 문장 중복은 피하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다시 반복하여 이제 신문사의 문패처럼 이어지는 우리만의 농담들은, 기자를 매 순간 뜨끔거리게 한다. 사실 기자는 이 신문사의 ‘바보’이기 때문이다. 뽀얗던 새내기에서 삭아버린 3학년이 되기까지 이곳에 뼈를 묻겠다며 실실 쪼개고 있는 기자는, 신문사 안팎의 모두에게 매번 바보라는 말을 듣는다. 왜 그렇게 매달리냐, 왜 그렇게 굳이 나서는 거냐. 남들에게 기자의 행동들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모순덩어리가 된다. 아무래도 기자는 머리가 나쁜 것이 틀림없다. 누구보다 소중한 동기들, 무엇보다 소중한 이 기사 한 장을 입으로 구겨 넣어 삼켜서라도 지켜내고픈 이 기자의 심정을 똑똑한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면서 도리어 본인의 논리는 지켜내지 못하니 말이다.

이렇게 비틀린 신문사의 논리는 기자실 내부에서만 통한다. 기자에게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엔 너무 막연하고 이상해서, 너무나도 비틀리고 엉뚱해서, 수십 번이고 놀라워하고 버거워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으나, 그것은 당최 풀어낼 수없이 비틀리고 꼬인 커다란 매듭처럼 보이기만 했다. 매듭의 빈틈은 찾지도 못한 채 무턱대고 그 큰 응어리에 부딪히던 때가 있었다. 맞지 않는 실을 잡아당겨 매듭을 도리어 조여버린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하고 겁만 한 움큼 먹어버린 적도 있었다. 차라리 그때에는 나름 똑똑했던 기자가 이젠 완전한 바보로 거듭난 것인지, 기자는 이제 기자 앞에 놓인 거대한 매듭에 놀라지 않는다. 빈틈을 따라가 하나하나 풀어내면 언젠가는 풀어지는 것이 매듭이다. 끈의 어느 부분을 당기면 매듭이 조여지는지, 어느 부분을 당겨야 풀어지는지, 처음엔 막연할지라도 뭐든 당겨보고 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시도가 두렵지 않다. 어떤 실수를 하든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이를 고치는 과정에서 기자는 스스로가, 우리가, 그리고 신문 전체가 나아짐을 느껴왔기에.

‘시간을 돌려 새내기 시절 홍대신문사 입사지원서를 제출하기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럼에도 너는 여기 S동을 찾아오겠니?’ 비틀리고 헛되기까지 한 기자들의 농담들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한 기자의 답변은 변함없다. 이제까지 이곳 S동에서 기자가 행해온 모든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매듭을 풀기 위해선, 뭐든 당겨봐야 아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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