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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희망의 싹을 심다삶의 회한을 그리다, 『깊은 숨을 쉴 때마다』(1994)

 

‘곧 비행기가 착륙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섬, 제주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제법 바람이 쌀쌀하게 부는 1월의 마지막 날, 기자는 기자의 고향이자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섬 제주에 발을 디뎠다. 방학에도 계속되는 신문사 일과 아르바이트, 인간관계에서의 미묘한 마찰에 질리려던 찰나였다. 『깊은 숨을 쉴 때마다』(1994)의 화자인 ‘나’도 그러했다. ‘나’는 독일로 출장을 간다는 핑계로 잠시 일상을 떠나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기 위해 제주로 떠난다. ‘나’처럼 우울한 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희망을 얻고 오리라. 공항 밖으로 나온 기자는 깊은 숨을 후- 뱉었다.

공항에는 공항만이 가지고 있는 묘한 설렘이 느껴진다. 여행을 시작하는 즐거움, 여행을 갈무리하는 아쉬움. 과연 이번 여행에서는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이처럼 들뜬 기자는 한 손에 카메라를, 다른 한 손에는 짐가방을 들고 소설 속 화자인 ‘나’의 첫 번째 여정지, 협재 해수욕장으로 떠났다.

 

제주의 서북 방향인 중국 쪽으로부터 산봉우리 하나가 제주를 향해 날아와 협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한 여인이 놀라 산이 날아온다’ 고 소리치자 날아오던 산이 그대로 바다에 떨어져 섬이 되었다는 비양도가 저만큼 내다보였다.

 

협재 해수욕장은 새하얀 모래와 투명한 바다가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나’와 ‘나’의 남자친구 J는 신발을 벗고 바다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했다. 기자가 만난 협재 해수욕장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반짝임이 눈부셨다. 철썩- 들려오는 겨울 바다의 파도 소리와 함께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자지러지게 웃는 연인들의 소리, 가족 여행을 온 것인지 단란하게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족들의 소리, 겨울바람의 소리가 어우러져 마치 하나의 음악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해변에서 ‘나’는 행복과 만족을 느낀 채 남자친구인 J를 육지로 보내고 성산포로 떠난다. 성산포로 가는 해안버스 안에서, ‘나’는 독일에 갔다는 거짓말을 믿고 있을 어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어머니는 딸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길 바랐다. ‘나’는 식혜 대신 커피를 마시고, 비누 대신 샴푸로 머리를 감는 딸을 보며 ‘체념’의 눈길을 보내던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한다. 기자의 어머니도 딸을 서울로 보내고 이전에는 없던 거리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그동안 어머니에게 죄송했던 일들을 하나씩 반성하며 덜컹거리는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렇게 기자와 ‘나’는 죄책감과 쓸쓸함을 느끼며 함께 성산포로 향했다.

「그런데 당근 싹은 왜?」

「말했잖아요. 그 베란다가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내 것이면 난 거기에 앉아 있지 않고 당근 싹이랑 이런 것들 기를 텐데.」

「그게 이유야?」

「네.」

「………」

「시시해요? 그래도 그건 내 꿈이에요.」

차로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성산포의 하늘은 맑았다. 유채꽃이 피어 있고, 머지않은 봄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기자의 옆을 지나쳐갔다.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기 위해 사계절 내내 수많은 사람들이 성산포에 머물렀지만, ‘나’의 관심은 오직 소설 속 인물인 ‘당근 싹을 든 소녀’와 같은 호텔의 묵고 있는 ‘308호 처녀’에 머물러있었다. 원래는 당근밭이었던 호텔의 308호 자리를 보며 베란다에 당근을 심기를 꿈꾸는 소녀, 누군가를 기다리며 한없이 연약해져 가는 308호 처녀. 그 둘은 베란다에 심는 당근 싹을 계기로 친구가 되어 함께 밥도 먹고 산책을 즐기기도 한다. 그들이 산책을 즐기던 길이 이곳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기자는 바다를 따라 난 거리를 따라 가벼운 산책을 즐겼다. 저 멀리 보였던 일출봉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편, 일출봉이 머지않은 곳에서 ‘나’는 노란 두건을 두른 할머니를 만나 해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흔 둘. 이제는 어서어서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보다도 더 관심 있게 해녀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은 일흔두 해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보아왔을 것이다. 식민지 생활과 전쟁과 어제까지의 그 모든 것, 바로 지금 저 해녀의 물질까지. 누구도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이제 할머니의 육체를 근거로 쌓여왔던 과거는 저 마른 살집을 마지막으로 하고 사라질 것이다.

할머니와 헤어지며 ‘나’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대해 생각한다. 할머니가 ‘나’에게 또 만나자며 건넨 인사는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할머니는 누구보다 죽음의 경계에 맞닿아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하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바로 308호 베란다에 당근 싹을 심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는 소녀였다. 그녀는 신장에 병이 있었고 투석을 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말없이 떠났을 때, 308호 처녀는 ‘나’와 방파제를 걸으며 소녀를 걱정한다. 소녀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나’의 위로를 들은 처녀는 바다를 향해 앉아 자신이 사랑하는 동생을 ‘갑자기’ 잃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는 갑자기 나 혼자서 뭘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요. 나는 그 애가 다시 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믿기지가 않아서, 날마다 그 애를 기다렸죠. 금방 그 애가 나타날 것 같았어요. (중략)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고들 해요. 일년 이년 정도만 지나면 지금의 일이 다 지난 일이 된다는군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처녀는 이 자리에 앉아서 항구를 내려 보았을까. 기자는 처녀가 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담하게 읊조렸을 법한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기자에게도 너무 소중한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낸 경험이 있기에 처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얀 배가 묶여 있는 선착장과 잘 어울리는 파란 하늘을 보며 기자도 보고 싶은 그 사람의 이름을 한 글자씩 하늘에 그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그리고 이 맑은 하늘을 보며 ‘나’는 제주를 떠나 도시에 돌아갈 것을 결정한다.

지금, 내 발치까지 밀려온 이 바닷물은 다시 내게서 가장 먼 곳으로 밀려갈 것이다. 하루에 삼만구천 리를 날아다니는 큰 새도 아직 도착을 못해봤다는 바다의 끝, 지금 여기 내 발치에서 가장 먼 그곳까지.

도시로 돌아가기 전 ‘나’가 처녀와 마지막으로 들린 목초지 밑 해변은 첫 번째 여정지인 협재와는 사뭇 반대되는 분위기였다. 흰 모래와 검정 모래. 이곳에 밀려드는 바닷물은 차가워 보이기도 했다. 성산포에 도착한 이후로 기자의 시야에 항상 걸려 있던 일출봉이 지금껏 봤던 모습 중 가장 크게 버티고 있었다. 아마 ‘나’의 마지막 여정지가 이곳인 것도 여행 처음에는 멀고 희미했던 일출봉이 점점 가까워지듯, 막연했던 희망이 점점 가까워지고 커지는 모습을 비유하기 위한 설정은 아닐까. 

6박 7일의 제주 여행을 마치고 다시 공항으로 향하는 기자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름다운 자연을 실컷 봐서일까, 희망의 일출봉을 기자의 마음속 한가득 담아서일까. 언제나 기자에게 여행의 끝에서 마주하는 공항은 아쉬움이었지만, 이번 여행을 마치고 마주한 공항은 이상하게도 여행을 시작할 때 느꼈던 두근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자는 막 제주 공항을 떠나 상공을 날고 있는 비행기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저 밑에서 처녀가 저 바닷가에 앉아 이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천지예 기자  jiye1108@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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