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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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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4일은 미국의 뉴스전문 케이블 TV 방송사인 CNN이 지정한 “해시태그 나의 자유의 날”(#MyFreedomDay)이었다. CNN은 특히 13세 이상의 전 세계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언제 자유를 느끼십니까?”(What makes you feel free?)라는 질문을 던지고, 자유의 가치를 훼손하는 현대판 노예제를 근절하자는 취지에서 기획한 자사의 캠페인에 한 줄 대답으로 참여해 줄 것을 촉구했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통한 네티즌들의 답변은 이날 CNN 채널의 화면 하단을 지나가며 실시간으로 소개되었다. 자유라는 인류 보편의 거대 화두를 사회관계망서비스와 같은 찰나적 미디어를 통해 재생시킨 기획은 분명 발상의 전환에 해당하고 이 역발상은 꽤 유의미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소소하기도 하고 거창하기도 한 남녀노소 네티즌들의 답변 내용을 일일이 전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다만 3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 홍대생들에게 이런 질문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잠시 돌아볼 계제를 가졌으면 한다. 

  언제 자유를 느끼냐는 질문은 어떤 외적 상황에서 혹은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자유인임을 자각하게 되느냐는 뜻으로 풀 수 있다. 또는 어떤 경우에 나의 자유가 제한당하거나 침해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느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미세한 뉘앙스로 갈리는 자유의 개념과 관련하여, 러시아 태생의 유대계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하여 전자를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로 보고 후자를 ‘무엇으로의, 즉 무엇을 할 수 있는, 할, 하기 위한 자유’로 보았다. 벌린은 외부의 강제나 타인의 간섭이 없는 상태인 소극적 자유는 궁극적으로 개인주의와 맥이 닿는 것으로 설명했고, 이성에 입각한 자기 지배, 달리 말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상태인 적극적 자유는 자칫 공동체주의나 그가 내심 우려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무튼, 비지배와 불간섭으로서의 자유의 개념을 중시한 벌린은 소극적 자유를 옹호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자유의 개념에 대한 정치철학적 논의는 그에 의해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CNN의 자유 프로젝트와 벌린의 자유론에서 약간의 자극과 단서를 추스르면, 3월의 캠퍼스에서 쟁점이 되는 학생의 자유에 관해 탐문해보는 데 도움이 된다. 종종 회자되는 자유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수강신청에 관한 것이 아닐까?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학생은 수강신청에 사활을 건다. 그래서 나는 이 수업을 들을 자유가 있다든지 저 분반 강좌를 듣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다는 등의 생각에 꽂히곤 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수업의 자유가 수업권으로 쉬이 연계되는 까닭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결권을 자유인의 조건으로 적시한 서구 문명의 오랜 관행이 학생들의 무의식 속에서 한몫했거나 교육의 기회를 통해 자기 성취를 꿈꾸는 이들에게 나의 가능성은 곧 나의 자유의 가능성이라는 통찰이 알게 모르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반성적으로든 아니든 자유를 운운할 때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자유는 일견 평등, 공정, 사랑, 정의, 신의 등의 가치와 촌수가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독보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경향이라는 점이다. 이 경향은 소유에 쉽게 매개되었고 최악의 경우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역사를 돌아보면 자유의 강도는 자유를 빼앗긴 자의 입에서 나올 때 울림이 컸다. 내 나라였던 것을 되찾을 자유를 외친 삼일절이 그랬고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인신의 자유를 되찾는데 수 세기를 허비한 흑인노예들의 한탄이 그랬다.     

  새 계절이 시작되는 3월, 하늘이 맑지 않은 것도 서러운데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에 무엇을 공부할 자유를 상실하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인본주의가 저물어 가는 현시점에서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내가 숨 쉴 자유와 내가 원하는 수업을 들을 자유는 모두 인류의 고질병 인간중심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엮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머지않아 기술적 특이점과 함께 도래할 탈인본주의가 인간의 자유를 더 많이 앗아갈 텐데, 높은 장벽이 새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구속물이 아님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우리는 바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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