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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는 거리의 법칙

시간은 공간

일본 전통건축 양식의 진입로는 아주 꼬불꼬불하다. 특히 도시마다 있는 봉건 영주 성의 진입로는 복잡하게 틀어져 있다. 성문을 열고 들어가면 앞에 벽이 가로막고 있다. 옆으로 틀어서 좀 더 걷다보면 또다시 벽이 막고 있어서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 식이다. 일본의 건축이 복잡한 진입로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설명이 된다. 

우선 보안상의 문제 때문이다. 과거 일본은 오랫동안 군소 지방마다 영주가 다스리는 봉건사회였으며 항상 옆 마을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언제 적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불안한 환경에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이나 마을 요새 등의 방어시설이 발달하였다. 심지어 어떤 영주의 성은 자객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루를 밟으면 소리가 나도록 설계되었다.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 마루판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어서 그 위치를 아는 주인만 소리가 안 나게 걸을 수 있게 하였다. 주인이라도 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다가 실수로라도 소리 나는 마루를 밟으면, 그길로 호위무사의 칼에 죽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건축이론가 건터 니슈케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니슈케에 의하면 미국처럼 공간이 넓은 곳에서는 시간거리를 줄이는 쪽으로 건축이 발달하고, 일본같이 공간이 협소한 곳에서는 시간을 지연시켜 공간을 심리적으로 커보이게 한다고 한다. 따라서 미국은 시간거리를 줄이는 고속도로가 발달했고, 일본은 좁은 공간을 넓게 느끼게끔 진입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전통찻집에 가보면 두세 평 남짓한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 열 번 가까이 진입로가 틀어져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적인 집이 실제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좁은 공간에서 살아야하는 경우, 좀 더 넓게 느끼게 하기 위해 전체 공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게 설계한다. 좁다고 집의 모든 벽을 다 터버리면 오히려 더 좁다고 느끼게 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머릿속으로 공간 전체를 그려보게 하면 실제보다 넓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하신다. 이는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감퇴하고 인상적인 기억도 적어져 그만큼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어렸을 때는 기억력이 좋아서 하루 동안에도 기억할 일이 많고 그만큼 시간은 꽉 채워져 느리게 흘러가는 것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뇌 시냅스 간 정보전달 네트워크 기능이 느려지면서 정보를 프로세스하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기억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적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많은 이벤트는 심리적으로 기억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시간을 길게 느끼게끔 한다. 결국 시간이 길게 느껴지면 공간 또한 크게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을 크게 느끼게 하려면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해야 하고,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하려면 기억할 사건을 많이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건들을 느낌과 감정으로 저장한다. 

철학자 강신주의 말처럼, 기억할 감정이 많다는 것은 인생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벤트가 많이 일어나는 거리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성공적인 거리로 자리잡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뜨는 거리가 되려면 다양하고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줄 이벤트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쇼윈도의 다양한 상품이거나, 혹은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모습이거나,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모습이거나 어떠한 것이든 좋다. 건축가는 이런 이벤트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무대장치를 디자인하는 연출가이다.

 

덕수궁 돌담길

우리는 앞서서 걷고 싶은 거리가 되기 위해서는 이벤트 밀도가 높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게 입구에 접근하기 쉬워야 함을 알았다. 또 하나, 공간의 속도가 느려야 한다는 점도 걷고 싶은 거리의 특징이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이 두 원칙이 다 충족되어야만 성공적인 거리가 되는 것일까? 덕수궁 돌담길을 보면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 혹은 정동길이라고 불리는 이 길에는 가게가 많지 않다. 오히려 다른 거리에 비해서 너무 없다. 정동 블록 안쪽의 조용한 거리인 정동길은 덕수궁 정문 왼쪽에서 시작해서 서울시립미술관을 지나 정동극장, 이화여자고등학교, 예원학교를 지나 경향신문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길 마지막에 횡단보도를 건너면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까지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과거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연인은 헤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자리가 과거에는 가정법원이었기 때문에,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는 연인이 가정법원에 이혼하러 가는 부부와 같아 보여 그런 말이 생겼다고 한다. 강북의 달달한 데이트 코스로 대표되는 지금의 돌담길엔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덕수궁 돌담길이 걷고 싶은 거리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벤트 밀도가 높은 거리는 아니란 점이다. 우선 걷고 싶은 거리의 두 번째 특징인, 속도가 느린 거리에 해당함은 확실하다. 서울시는 2004년도에 덕수궁 돌담길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적이 있다. 새로이 가로수 48주를 심고, 자동차가 인도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볼라드(bollard) 120개를 설치하였다. 그 이전부터 일방통행인 1차선의 길 위에는 차량의 통행량도 적고 조용한 거리였다. 공간의 속도는 확실하게 느린 곳이다. 

하지만 이 거리가 사랑받는 데에는 공간의 속도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선 건축유산으로 꽉 채워진 공간이란 점을 들 수 있다. 덕수궁 옆으로부터 시작해 걷다보면 오른편에는 조선시대의 건축유산인 덕수궁 돌담길이, 좌측으로는 시립미술관과 이화여자고등학교 그리고 구 러시아 공사관 같은 구한말의 건축물이 있다. 우리나라에 이 정도로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의 건축물이 밀집한 지역은 없을 것이다. 건물들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서 조경도 답답하지 않고 좋다. 오래된 건축물과 자연이 거리의 공간을 채색하고 있는 풍요로운 거리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좀 더 실질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담장과 보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은 예로부터 외국 대사관들이 많은 곳이다. 구한말에 러시아 공사관이 있었고, 지금도 러시아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 공관이 위치해 있다. 이유는 과거 고종이 이쪽으로 환궁을 해서라고 한다. 이같이 미국대사관 공관은 치안이 중요한 공간이라서 담장을 높게 쌓았다. 덕수궁 돌담길 역시 마찬가지이다. 담장 옆을 연인과 함께 걸으면 일단 주변 시선이 차단된다. 이벤트 밀도가 높은 거리를 걷는 것이 구경거리를 원하는 사람의 선택이라면, 담장 옆을 걷는 사람들은 조용하게 방해받지 않고 남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연인들이다. 특히 담장 옆에선 연인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벽에 반사되어서 둘의 이야기가 잘 들린다. 특히나 정동길같이 차량 통행이 적은 곳은 더 잘 들린다. 

좀 더 은밀한 곳을 원하는 커플은 덕수궁과 미 대사관 공관 사이의 길을 택하면 더없이 좋다. 이 길은 좌우로 담장이 있어서 매우 조용하고 통행 차량도 없다. 이곳이 주택가의 다른 담장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일단 이 길은 보안이 철통같다. 다른 골목길은 조용히 걷기에는 좋지만 주변의 담장이 덕수궁 돌담길만큼 아름답지도 않고 간간히 정원이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조용하고 후미질수록 은밀하긴 하지만 그 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그런데 정동길에는 여러 대사관 덕분에 안전하다. 담장으로 프라이버시가 확보되고, 연인이 속삭이는 소리도 서로 잘 들리고, 간간히 여유로운 마당도 보이고, 안전한 거리가 정동길이다.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이 갖추어진 거리는 또 찾을 수 있겠으나 마지막의 안전함은 웬만해서는 대체 불가능한 요소인 듯하다. 뜨는 거리가 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보안’이다. 대부분의 거리에서 보안은 쇼윈도의 불빛과 사람들의 눈을 통해 생겨나지만 정동길처럼 대사관 보안이라는 이유로 형성되기도 한다. 

유현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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