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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클을 좋아하는 사람은 읽으면 안 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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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나는 ‘호불호’라는 말을 엄청 자주 쓴다. 그 영화는 호불호가 갈리더라, 이 친구는 호불호가 분명한 것 같다, 하는 식으로.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그 말을 꺼내는 나도 호불호가 확실한 편이고, 빈도수를 헤아려 보면 ‘호’보다는 ‘불호’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나는 피클이 싫고, 빙판길이 싫고, 무례한 것도 싫다. 일찍 일어나는 게 싫고, 양말 빨래하는 게 싫고, 또 피클이 싫다.

  오이피클. 그 초록물 나오는 음식이 얼마나 끔찍한지 얘기하는 건 적당히 생략하기로 한다. 잘려져 있든 잘려져 있지 않든 쭈글쭈글해서 퍽 징그럽다든가, 시큼한 냄새에다 씹을 때 물컹한 느낌이 난다든가, 설명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피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난 태어나서 그걸 맛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입맛이다.

  혐오는 본능 같은 것이라고 한다. 진화에 따른 오랜 학습으로 터득된다는 뜻이다. 어떤 대상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사람은 원초적인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 감정에 수긍하고 몸을 내맡길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완전히 이성의 영역이다. 현대인에게는 편견과 사실을 구분 짓기에 충분한 지성과 정보력이 있다. 일단 무언가에 대해 혐오를 느꼈다면 그걸 지속할지 말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피클에 있어서만큼은 그게 나에게 무조건 해로울 것이라는 냉철한 판단을 내린 바 있다. 그게 내 취향이 되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라면 그렇다는 얘기다.

  계속 말해왔듯 지금 난 피클을 싫어하는데,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취향이란 변하기도 하는 것이니까. 만약 어떻게 해도 도저히 바뀌지 않는 것이라면 그건 기호의 차원을 아득히 벗어난 선천성의 문제일 것이다. 인종이나 성적 지향, 연령 같은 것들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건 경멸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된다. 얼마 전에 동성애자는 존중하지만 동성애는 싫어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정말 피클 같은 논리다. 동성애 혐오론자 분들은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여기던 시기를 지나 개인의 기호로 보는 경지에 오른 모양이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그 사람의 기호나 선택의 결과로 치부해 버린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한 불합리의 지옥이 된다. 나아가 자신의 피클 아래에 다른 사람의 인권을 깔아뭉개는 사람이 많아지고 많아져서 그게 일종의 질서로 자리 잡으면, 우리는 얼마나 무력하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될까.

  어떤 사람의 고유한 특성을 들어 혐오의 매개로 삼는 것은 명백히 폭력이다. 그리고 폭력은 소화되거나 용인되거나 묵시되거나 자연스러워져서도 문화가 되어서도 안 된다. 좋다 싫다를 논할 수 있는 것은 취향이 관장하는 부분까지이다.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라고 말해도 받아들여지는 데까지만 선호도를 매기면 된다. 낙인찍고 헐뜯는 건 저기 피클에나 하면 족하다. 피클한텐 그래도 좋다. 피클은 못 생겼고 맛도 이상하다.

  가끔 내가 하루 동안 했던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고 환멸에 빠지는 날이 있었다. 지나가는 어투로, 예사로, 생각 없이 뱉은 말이지만 명백히 타인을 피클처럼 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때.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이미 내면화되어 나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순간이 수차례 있다. 그건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우선 그걸 알았다는 것 자체는 고무적이다. 더 이상의 무차별적 혐오가 나를 잡아먹지 않도록 다스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깨기 싫어서 웃어넘겼던 지인의 혐오 발언에 반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명예에 영향을 주는 얘기를 할 때 조금 더 신중해지는 정도로도 폭력은 나에게서 멀어진다.

  사람을 싫어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당장 학교에만 해도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누구를 싫어하는 이유는 조별과제에 무임승차를 해서, 새내기를 꼬시는 데 혈안이 돼 있어서, 그 친구가 먼저 나를 싫어해서 등등이어야 한다. 특정 학과라서, 어디 출신이라서, 남자 혹은 여자답지 않아서와 같은 기준은 날카로운 이성으로 배제해 버리자. 현명하지 않다.

  결국은 그것이다. 사람의 존엄에 대해 호불호를 논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호불호는 그런 데 쓰는 말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해서 여기, ‘싫다’의 좋은 용례를 공개한다. ‘나는 피클이 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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