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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속에서 교훈을 찾다충무공과 허소치의 삶을 따라가 보는 『자전거여행』(2014)

이전 호에서 『태백산맥』(1989)을 취재한 기자는 이번에는 벌교를 떠나 진도로 향했다. 목적지까지 향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약 2시간이었다. 기자는 2시간이나 차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꽤 답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량이 도로에 들어서자 기자의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다.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해남의 푸른 바닷가와 조용한 마을을 보면서 기자는 평화로움을 느꼈다.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매일 과제에 쫓기며 무엇인가를 해내야만 하는 도시속 일상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해방감도 잠시, ‘아차!’ 싶었다. 도서명이 『자전거여행』임에도 기자의 발은 자동차 매트 위에 있었다. 자전거를 챙겨 온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잠시 고민 끝에, 기자는 두 발을 믿어보기로 했다. 김훈 작가가 진도를 여행하며 보게 된 이순신의 벽파정과 허소치의 운림산방 가는 길을 자전거가 아닌 기자의 두 발로 직접 걸으며 작가의 감상을 느껴보기로 했다.

 

진도대교 밑에서 바다는 겨울 들판을 건너가는 눈보라 소리를 낸다. 흰 갈기를 휘날리는 물살은 출정하는 군마(軍馬)처럼 우우 함성을 지르며 명량(鳴梁)해협을 빠져나가 목포 쪽으로 달려간다. (중략) 물길이 거꾸로 돌아서는 사이마다 바다는 문득 잔물결 한 점 없이 거울처럼 고요해지고, 질풍노도를 예비하는 이 적막의 순간에 바다는 더욱 무섭다.

 

진도 초입에 들어선 순간 나타난 것은 거대한 진도대교였다. 진도대교에서 기자는 이 다리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바닷바람에 어떻게 버티는 것일까 생각했다. 차량의 창문을 열고 있자니 얼굴에 세찬 바람이 불어닥쳤다.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니 진도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물살은 거칠고 사나웠다. 이 물살을 뚫고 명량(鳴梁)으로 나아갔을 이순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슴에 근심 가득 뒤채이는 밤(憂心輾轉夜)

새벽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殘月照弓刀)

이순신의 글은 영웅다운 호탕함이나 과장이 없고 무협의 장쾌함이 없다. 그는 악전고투 끝에 겨우겨우 이긴다. 그는 영웅 된 자의 억눌림의 비극을 진술할 때는 단호하게도 말을 아끼고, 온갖 정한(情恨)에 몸을 떠는 한 필부의 내면을 진술할 때는 말을 덜 아낀다.

 

진도대교에서 본 이순신 장군 동상은 광화문의 동상에 비해 더욱 전진하는 모양이 눈에 띄며, 장군으로서의 강인한 면모를 더 살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기자는 아쉬움을 느꼈다. 동상이 그의 인간적 면모를 담아내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썼던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큰일을 앞두고 걱정하며 밤을 지새웠던 모습은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또 그가 남긴 글에는 흔히 영웅소설이나 무협 소설에서 등장하는, 악당을 손쉽게 제압할 것이라 자부하는 생각이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세운 업적은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기자는 앞으로 새워질 새로운 이순신 동상은, 적과의 전투에 대해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느껴지는 형상이 되기를 조심스레 바란다. 그러면 대중들이 이순신 장군을 역사 속 위인으로만 인식했던 것에서 벗어나 그를 우리와 같은 인간적인 존재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순신의 적은 일본 군대가 아니라 겁에 질려 도망가는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그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는 죽음의 힘으로 이 아수라를 돌파한다. 그는 죽음 앞에서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다. (중략) 싸우다 죽든지, 달아나다 죽든지, 군율에 죽든지 죽음의 방식만이 선택의 길이다.

 

기자는 명량해전에 깊숙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선조수정실록』(1657)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통제사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 아래에서 적을 격파하여 적장 마다시를 죽였다’. 기자는 이순신이 적장을 비롯한 왜군과 치열하게 싸웠던 벽파정(碧波亭)에 도착했다. 벽파정에 가려면 입구에서 출발해 작은 돌산을 뚜벅뚜벅 넘어서야 했다. 돌산 중턱의 벽파정 쯤에서 기자는 정상에 있는 무엇인지 모를 기념비에 관심이 갔다. 돌산 정상에 올라 확인해 보니 ‘충무공 이순신 기념비’ 였다. 기자는 기념비가 있는 산 정상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이순신도 이곳에서 조용한 진도 바다를 바라보며 전략을 구상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의 핵심 전략은 복잡하지 않다. 이순신은 매 전투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고 달려드는 각오 하나로 뛰어들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는, 배수진을 친 삶을 택했다. 현대 한국 사회는 계속해서 복잡해지고 있다. 그 안에서 삶의 정답을 찾는 기자는 벽파정으로 내려와 이순신에게 묻는다. “복잡해진 사회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마 그는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 싶다. “단순하게 생각하게. 도망갈 길을 생각하지 말고 문제의 본질에 달려들게.”

 

내가 깊은 산속에 혼자 살자니 적적함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비록 책은 있으나 안력(眼力)이 좋지 않아 모두 포기해버렸고 또한 마음속에 경영하는 바가 없어 흰 머리털을 어루만지며 홀로 슬퍼할 뿐이었다. 사촌(沙村)의 차가운 방아는 석양에 멀리 보이고 계사(溪寺)의 맑은 종소리는 바람결에 들린다.

 

기자는 작품 속 <원형의 섬>의 허소치(1808~1893)가 지냈던 운림산방(雲林山房)으로 향했다. 산길을 지나니 초가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관광단지가 되어 옆에 멋들어진 기와집도 있지만, 당시에는 산자락에 자리했던 조용한 집이었다. 위 구절 속 ‘방아’는 민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방아가 멀리 보인다고 표현한 점에서 허소치가 외로운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그는 유언에서 자녀들에게 “고향을 떠나 도시에 가서 살아라”라고 말했다. 그의 유언을 들으니 기자는 허소치가 어떠한 이유로 50살이 되던 해에 진도, 심지어 그곳에서도 고립된 산자락에 귀향하여 집을 지었을지 더욱 궁금해졌다. ‘만일 그가 예술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장소만이 필요했다면 서울 근교에 있는 작은 동네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치로(癡老)가 한가로이 고향의 옛 동산에 돌아와 지내니 만 가지 사념은 사라졌다. 오직 한 개의 소나무 베개를 옆에 두고 있으니 몇 권의 책을 한쪽으로 치워놓은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허소치는 자신을 치로(癡老), 어리석은 노인으로 정의한다. 기자는 초가집에 걸터앉아 허소치가 되어보기로 했다. 그가 보았던 풍경과 많이 달라졌겠지만, 이어져 있는 산덩이들과 예쁜 연못을 보고 있자니 허소치와 마찬가지로 잡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서울에서 기자는 집과 학교를 오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다. ‘전공과목 과제가 뭐였더라?’, ‘이번에 맡을 기사는 누구부터 인터뷰할까?’ 등 혼자만의 사색에 빠지는 시간이 많았다. 반면 이곳은 달랐다. 기자의 마음은 평화로워졌고, 기자는 오롯이 인근 풍경을 보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자는 좀 전의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운림산방은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기자도 생각이 복잡할 때 허소치의 초가집을 고향 집처럼 자주 와봐야겠다고 느꼈다.

 

그 옛 모습의 원형이라는 것은 오직 군더더기가 없고 단출한 것이다. 그리고 결핍 속에서 우아한 것이다. 그것이 허소치가 말했던‘법(法)’이다. “법이 있어야 아름다울 수가 있고 아름다워야 신묘하게 될 수가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허소치가 결핍 속에서 우아미(美)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 것을 토대로 김훈 작가는 운림산방이 지나치게 화려해져 이전의 우아미를 잃어버렸다고 지적한다. 기자도 김훈 작가의 지적에 공감이 갔다. 운림산방이 관광단지로 개발되면서 대규모 기념관이 건설되는 등 허소치가 보았던 옛 운림산방의 미(美)가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까웠다. 물론 기념관의 진도 관련 정보가 진도 여행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기자의 안타까움을 이길 순 없었다.

박주형 기자  여유 속에서 교훈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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