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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빛깔에 흠뻑 젖었네, 홍차 100% 즐기기 

 

“떫은 홍차에는 영국의 현실주의가, 엽차의 신비한 향미에는 오리엔트의 꿈이 서로 대조적인 맛을 풍기고 있다.” -이어령,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中-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이어령(1934~) 작가가 홍차에 대해 남긴 말이다. 위의 말처럼 엽차(葉茶)가 동양의 차 문화를 상징하듯, 홍차는 우리에게 영국의 대표적 차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거의 모든 차의 원산지는 중국이고, 홍차 역시 그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또한 홍차는 단순히 귀족만의 전유물이 아닌, 영국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음료이자 남녀 갈등의 중심에 서 있던 음료이기도 하다. 홍차 속 숨겨진 이야기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홍차, 중국의 문화에서 영국의 상징이 되다

 

▲영국에서 유행하던 중국산 도자기. 홍차를 마실 때 주로 사용되었다.

 

홍차의 원류(源流)는 중국의 우롱차부터 출발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중국 푸젠성 우이산(武夷山)에는 대홍포(大红袍)라는 우롱차가 유명한데, 이 대홍포는 색깔이나 맛, 향 등이 우롱차보다 홍차에 가까운 편이다. 이외에도 중국 곳곳에는 홍차와 유사한 형태의 우롱차가 존재한다. 그리고 영어권에서는 홍차를 블랙 티(Black Tea)라고 부르는데, 이는 영국으로 새롭게 수입된 우롱차가 기존의 차(茶)를 의미하던 녹차보다 찻잎 색깔이 조금 더 검다 하여 ‘블랙 티’라고 구분지어 불렀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여겨진다. 홍차의 유래는 이 밖에도 다양한데, 그 중 하나로는 찻잎을 선박으로 운송하던 도중 찻잎이 산화가 되었는데 이를 끓여 마셔보니 의외로 맛이 좋아 대중화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다른 유래로는 청나라 시절 한 마을에 군대가 들이닥쳐 사람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관리되지 못한 찻잎이 상해버리고 말았는데 버리기 아까워 말린 후 차로 만들었더니 서양에 몇 배의 가격으로 팔리게 되며 홍차로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사실 찻잎은 습기로 인해 쉽게 산화되지 않기 때문에 첫 번째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지고, 두 번째 이야기 또한 청나라 시대 이전부터 홍차와 유사한 제다(製茶)법이 있었기 때문에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중국의 우롱차가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식 홍차의 토대가 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라는 것이다.

이후 영국에서는 1662년 찰스 2세(Charles Ⅱ, 1630~1685)가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왕녀(Catarina de Bragança, 1638~1705)와 결혼하면서 중국 홍차가 처음으로 전파된다. 카타리나 왕녀가 결혼하면서 영국 왕실에 선물로 중국 차를 가져온 것이다. 처음 영국에 홍차가 들어왔을 때는 “사치스럽다”, “남자답지 못하다” 등 각계각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여성 및 중산층을 중심으로 홍차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이에 영국은 차의 재배 및 제다법을 알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원산지인 중국은 기밀이라는 입장을 거듭 강조하며 이를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1848년 식물학자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 1812-1880)이 중국 상인(몽골 고관으로 변장했다고도 알려짐)으로 변장하여 중국에서 차 종자와 재배 기술을 몰래 빼오기에 이르렀는데, 이 종자를 토대로 만들어진 홍차가 그 유명한 인도의 다즐링(Darjeeling)이다. 이후 영국은 식민지를 늘려가며 스리랑카의 실론 티(Ceylon tea) 등 홍차 농장 확장에 박차를 가했고, 립톤 사의 창업자인 T. J. 립턴(T. J. Lipton, 1850-1931)이 홍차 부흥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명실상부한 홍차의 종주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 후로도 1차 세계대전 중 영국 참호에서 티타임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나돌거나 영국 표준관리국에서 홍차 끓이기 매뉴얼을 지정할 정도로 영국의 홍차 사랑은 여전하다.

 

‘남자는 커피, 여자는 홍차?’ 17세기 영국 성(性) 갈등의 중심에는 홍차가 있었다

 

▲플레저 가든에서 남녀노소 홍차를 즐기는 모습

 

이렇게 영국 대표 문화가 된 홍차가 17세기 당시 영국 내 남녀 갈등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꽤 생소하게 다가온다. 홍차가 유입되기 시작한 17세기 당시 영국에는 커피가 신문물로서 유행하고 있었다. 그 광풍은 어마어마해서, 커피하우스(Coffeehouse)라는 일종의 카페이자 소통 장소가 생겨나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과학자, 철학자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며 토론을 하는 풍습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커피가 여성과 아이에게 해롭다는 소문이 돌면서 커피와 커피하우스는 남성의 전유물이 되었고, 여성은 커피하우스에서는 물론이고 집에서도 커피를 마실 수 없었다. 당시 여성이 마실 수 있는 음료는 버터를 만들다 남은 버터밀크 정도였다. 그러던 중 카타리나 왕녀가 홍차를 들여오면서 홍차를 마시는 것이 영국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져나갔고, 이에 여성들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홍차 소비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남자는 커피, 여자는 홍차라는 관념이 생겼다. 또한 여성들이 커피가 남성의 성 기능을 떨어뜨린다는 루머를 퍼뜨리는 등 자국 이성 혐오에 가까운 비난이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 영국인들은 홍차를 즐길 때 단순히 홍차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홍차와 함께 들여온 중국산 도자기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도자기에 홍차를 마심으로써 자신이 교양있는 사람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홍차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지는 데 반해, 커피는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영국 내 홍차 소비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차별 없이 남녀노소 홍차를 즐기게 되었고, 남녀 모두 출입 가능한 '플레저 가든(Pleasure garden)'이라는 티파티 장소가 탄생하기도 했다.

 

홍차, 문화가 아닌 사회와 역사에서 바라보다

 

▲보스턴 차 사건을 그린 상상화(想像畵)

 

역사에서 드러나듯 홍차에는 ‘귀족들이 마시는 음료’라는 인식이 강하다. 특히 한국, 일본 등에서는 영국의 귀족 식문화로 홍차를 떠올리는 경우가 잦은데, 실제로 홍차는 계층과 관계없이 누구나 즐겨 마셨던 음료였다. 홍차에 들어있는 카페인은 각성 효과가 있고, 차 특유의 씁쓸한 맛을 줄이려고 탄 설탕은 열량을 적당히 보충하며 노동자들에게 작업 능률을 높여주는 일종의 각성제로 작용했다. 우리가 야근 혹은 밤샘 과제를 할 때 에너지드링크를 마시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산업 혁명 직후에는 홍차를 식사 대용으로 마시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산업 혁명의 슬픈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영국이 농업 사회가 아닌 공업 사회로 진입하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감자나 밀 등의 ‘생산물’이 아닌 ‘임금’으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임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나마 값이 싼 설탕물 정도에 불과했고, 홍차는 이 설탕물을 조금이나마 ‘먹을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한 필수 재료였다. 설탕물의 단맛이 너무 강해 첨가물을 넣지 않으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들의 홍차 음용은 단순한 문화 향유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홍차가 미국의 독립 국가 건설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1773년 영국은 ‘홍차법’을 제정하여 영국이 설립한 동인도회사를 통해 중국의 홍차를 본국과 식민지에 판매하도록 했다. 이는 홍차 가격의 하락을 불러와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기존에 홍차 밀수를 통해 이익을 취해온,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의 홍차 상인들은 반발했고, 홍차법 제정 과정에서 영국이 식민지 자치기구와의 합의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에 대한 미국 내 지식인들의 불만도 컸다. 이에 미국 내 상인들과 지식인들이 협력하여 수입된 홍차를 모조리 바다에 버리며 항의했던 사건이 바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1773)이다. 그리고 이 보스턴 차 사건은 식민지의 자치권 보장과 간섭 최소화를 요구하는 운동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미국 독립 혁명의 씨앗이 되는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서두에서 언급된 이어령 작가의 “떫은 홍차에는 영국의 현실주의가”라는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홍차의 달콤함과 쌉싸름함에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과시하던 영국 귀족들의 허영심, 하루하루 착취당하던 노동자들의 아픔, 미국의 독립을 외치던 이들의 열정이 모두 녹아 있다. 비록 입안에 짧게 머무르겠지만, 카페에 가서 홍차 한 잔을 시켜놓고 한 모금씩 들이키면서 지나간 홍차의 역사와 당시 영국 구성원들의 심정을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김주영 기자  B881029@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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