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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한 마음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진주를 물들이다, 『논개』(2007)

스무 해를 불꽃같이 살다 간 논개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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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어느 날, 기자는 유독 날씨가 흐리던 서울을 뒤로하고 아름다운 남강이 흐르는 도시, 진주로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경상남도에 위치한 진주는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무려 4시간을 가야 하지만, 힘들고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자의 생각이 무색할 만큼 진주로 가는 길 창밖으로 본 자연은 아름답고 푸르기만 했다. 서울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산과 자연이 곳곳에 펼쳐진 풍경이 낯설어서일까. 기자는 점점 진주에 가까워질수록 이번 여행의 주인공인 ‘논개’의 삶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로운 인물이라고 알려진 논개의 일대기를 재구성한 소설 『논개』(2007)는 그녀의 삶과 애국심, 그리고 남강에 투신한 사실 이면에 숨겨진 애통한 사랑 이야기 등을 함께 드러내어 독자에게 더욱 다채로운 읽기 경험을 선사한다. 이는 진주로 향하는 내내 논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이번 여행에 대한 기자의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서울과는 달리 작고 아담한 매력이 있는 진주에 도착한 기자는 소설의 속 당시 진주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이 여행의 첫발을 디뎠다.

물속에 눈이 온다. 사납게 숨구멍을 틀어막으며 짓쳐 드는 물속에서도 이팝나무 꽃마냥 너즈러지는 그것을 본다. 걸음마를 가르치는 아비의 손끝을 잡으려 안타깝게 내미는 돌쟁이의 손등에, 물일에 시달려 메밀 자루를 맨손으로 뒤진 듯 거칠어진 계집애의 손등에, 굵은 마디가 부끄러워 모지라진 치마 뒤로 감춰 숨기던 숫보기의 손등에 잠깐 머물렀다. 녹아들던 눈, 분분히 내리는 서러운 설이(雪異), 침침히 시야를 가리며 눈이 내린다. 눈물 같은 눈이 흩날린다. 짧은 생의 기억들이 사금파리처럼 부서져 반짝인다. 

이 소설은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기자는 그녀가 투신했다는 바위인 ‘의암(義巖)’을 먼저 찾아가 보았다.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한 이곳은 수많은 관광객으로 북적거렸다. 그들도 기자처럼 논개의 발자취가 궁금하여 이곳을 찾은 것이리라. 의암은 가파른 절벽과 깊은 수심의 남강이 붙어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하고도 장엄한 장소였다. 이곳으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한 논개는 양손에 가락지를 끼워 손이 풀리지 않게 만든 후 그를 안고 강물로 투신한다. 투신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온 마음을 바쳐 사랑했던 최경회를 떠올리며 그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 논개는 강물 속에서 왜장과 함께 서서히 죽어가지만, 최경회에 대한 사랑은 ‘호사’였고 ‘행복’이라며 미소로 생을 마무리한다. 이러한 애달프고도 아름다운 논개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의암을 바라보는 기자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비록 현재는 의암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그 형태가 많이 변화하고,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진주시 대표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누가 다녀가도 의암이 나타내는 ‘의로운 바위’라는 뜻은 평생 변하지 않기를 소망하며 기자는 진주성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것은 마치 아득히 먼 하늘 모서리에서 살별로 흘러온 것만 같았다. 그토록 살차게 허공을 저어 왔기에 언제 어디로부터 다가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중략) 사랑,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소급되었다. 고통과 초조와 번민, 그리고 발끝으로 허방을 딛는 듯 철렁한 상실감이 한순간에 설명되었다. 기쁨과 설렘과 기대, 스치는 눈길과 무심한 손짓에도 넘쳐흐르던 환희가 이해되었다. 사랑, 그것일 수밖에 없었다.

 

논개가 의암에서 남강으로 뛰어드는 순간까지 그리워하고 사랑하던 인물인 최경회는 그녀의 남편이다. 논개는 17세가 되던 해 김씨 부인의 주선으로 담양 부사로 재직하던 최경회와 백년가약을 맺게 된다. 하지만 그해 최경회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화순에서 모친의 삼년상을 치르게 된다. 논개가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던 도중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이에 최경회는 군사를 모아 진주성에서 전쟁을 치르고, 그런 그가 그리웠던 논개는 남장하여 진주성으로 간다. 그곳에서 논개와 최경회는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깨닫고 잠깐이나마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기자는 공원과 같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진주성 내부를 돌아다니며 당시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보았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일본의 위협으로 안정적인 행복의 삶을 약속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한 애틋함과 안타까운 마음이 컸을 것이다. 기자가 그러한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논개와 최경회가 나눈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진주성 내부가 가득 차있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촉석루의 산뜻한 단청 아래 남색 끝동 자주 고름의 미색 저고리가 산연하다. 맨손으로 입춤을 추는 사이사이 날렵한 깃과 낭창한 고름의 금박이 눈이 부시게 반짝인다. (중략) 살풀이장단 대신 굿거리장단인 자진타령 가락으로 시작하여 차분하면서도 끈끈하고 섬세하면서도 애절한 무태로 연상에 둘러앉은 이들을 현혹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진주성은 몰락하고 최경회는 동료 장수들과 함께 자살한다. 이에 논개는 사랑하는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왜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자신의 성씨를 포기하고 기생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에 친구 ‘산홍’의 도움으로 기생 명부에 이름을 올린 논개는 영남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촉석루에서 열리는 왜군의 축하연회 자리에 가게 된다. 논개는 촉석루에서 기생의 노릇을 하며 왜군을 유혹한다. 기자는 이 촉석루 마루에 올라서 남강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 자리에 서서 가족을 앗아가고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왜군과 함께 자신의 남편이 투신한 남강을 바라보는 논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논개의 분한 심정과는 모순적이게 남강으로 비추는 햇살은 마냥 따듯하기만 했다.

 

사랑하였다. 온 생애에 단 한 사람을. 또한 사랑하였다. 아프고 아름다운 땅을, 그곳에서 태어난 슬픈 운명을. 그러나 그것들이 어떻게 다른지는 말할 수 없다. 사랑의 경중도 따질 수 없다. 모든 사랑은 진정으로 닿아, 기어이 닮아있기 마련이므로.

 

촉석루를 뒤로하고 기자는 논개를 따라가는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기 전, 그녀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에 들렀다. 기자는 사당 앞에 서서 그녀의 초상화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선을 사랑하고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사랑과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기자에게도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촉석루 옆에 세워진 사당에서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 최경회가 투신한 남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따듯한 햇빛에 반사된 남강의 표면이 눈이 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렇게 아름답지만, 그 속에는 논개와 최경회의 마음과 사랑이 담긴 애틋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남강을 바라보며 기자는 진주에 마지막 인사를 건냈다.

기자는 진주에서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고속버스터미널에 앉아 오늘 하루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카메라 속 사진에 나타난 진주성과 촉석루, 의암, 사당의 모습이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의 한(恨)이 서린 이 공간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논개와 최경회가 서로를 그리고 나라를 사랑한 만큼 기자 또한 더더욱 주변 사람들과 우리나라를 사랑하겠노라 다짐했다. 4월의 어느 봄날, 진주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기자가 마주한 이 아픈 역사는 기자의 마음과 책임감을 무겁게 만들기 충분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라 멀어지는 진주를 바라보며 기자는 생각했다. 그들의 마음을 절대 잊지 않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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