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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석, 〈고산구곡도〉, 19세기, 견본담채, 106.3×33.5cm, 소장번호: 1505
  • 박물관 인턴 이소리
  • 승인 2019.05.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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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석, 〈고산구곡도〉, 19세기, 견본담채, 106.3×33.5cm, 소장번호: 1505

홍익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는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는 황해도 고산군 석담리에 있는 고산구곡의 아홉 곡을 그린 10폭 병풍이다. 고산구곡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고산구곡가」를 지은 배경이자 서원을 경영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이이는 주자의 무이구곡처럼 조선 땅에 구곡을 두어 주자를 따른 성리학자의 면모를 보였다. 고산구곡은 이후 1세기가 지나서야 그림의 소재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주로 〈고산구곡도〉는 주자에서 이이로 이어져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까지 성리학의 도통이 계승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려졌다.

〈고산구곡도〉의 전체 10폭에 고산구곡 아홉 곡이 각 폭마다 나타나고, 나머지 한 폭에는 예서체로 석담팔규(石潭八規)와 정묘조성유(正廟朝聖諭)가 기록되어 있다. 송시열은 그림과 시를 함께 싣기 위해 이이의 국문 「고산구곡가」를 한역하고 노론 문인들에게 각 곡마다 차운시를 짓도록 하였다. 따라서 〈고산구곡도〉의 각 폭에는 해당 곡의 그림과 함께 이이의 시, 송시열의 한역시, 노론 문인들의 차운시 구절이 적혀있다. 고산구곡은 1곡 관암, 2곡 화암, 3곡 취병, 4곡 송애, 5곡 은병, 6곡 조협, 7곡 풍암, 8곡 금탄, 9곡 문산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곡이 주는 아름다운 경관이 시절과 어우러져 묘사되었다.

고산구곡이 그림으로 그려지기 이전부터 이미 조선에서는 〈무이구곡도〉를 그려왔다. 하지만 무이구곡은 중국의 땅을 그리는 것이자, 실제와는 다른 이상화된 장소를 그렸다는 점에서 고산구곡과는 차이가 있다. 고산구곡은 조선의 실재하는 땅이며 이를 그릴 때 기행문을 참고하여 사실과 비슷하게 그리려 노력했다. 그리고 〈고산구곡도〉는 시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으로서 시의도의 성격도 보여준다. 각 폭마다 그려진 장면은 그 곡을 노래한 구절에서 대표적인 부분을 시각화하여 시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조선 중후기에 〈고산구곡도〉는 조선시대 학자들의 입지를 증명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였고, 조선 말기에 이르면 그 의미가 다양해져 산수화와 시의도의 면모를 띄기도 하며 민화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고산구곡이 그려지던 초기는 노론 문인들이 주자로부터 이이를 거친 자신의 학맥을 공고히 하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학문적 위상과 정통성을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17~18세기에 송시열 이후 기호학파 문인들은 선현을 따라 직접 자신들의 구곡을 설정하기도 하였고, 이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고산구곡도〉는 도통 계승 목적으로 제작되기보다 감상을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산수화 소재로도 그려지며 판화로 다수 제작되어 민간에 널리 유통되었다. 조선 19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본관 소장 〈고산구곡도〉는 고산구곡이 민화풍으로 그려지기 시작하는 단계를 잘 보여준다. 특히 이 작품은 이이의 성리학 이념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된 상황에서 정조의 명으로 그려진 원본을 모사하였다.

 

※ ‘박물관에 가다’에 소개된 소장품의 이미지는 홍대신문 홈페이지 <문화> 섹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박물관 인턴 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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