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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지음, 김시준 옮김, 을유문화사, 2008

<현대문학작품 읽기> 송민호 교수가 추천하는 『루쉰 소설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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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해 낮게 소리 내어 말하는 일

 

 

중국을 대표하는 근대문학자 루쉰(魯迅, 1881~1936)은 자신의 첫 번째 소설집에 ‘함성’이라는 의미의 <납함呐喊>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동시대 중국의 ‘희망 없음’에 대해서 말하였다.

“가령 말일세.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네. 오래지 않아서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사멸되어 가고 있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비교적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켜서, 그 소수의 불행한 이들에게 구제될 수 없는 임종의 고초를 겪게 한다면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흔히 철방의 비유로 알려진, 이 루쉰의 비유는 아무 곳을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희망’을 말하는 행위의 본질과 그에 얽혀 있는 자의식을 잘 보여준다. 일본의 대학에 유학을 갔던 시절, 본래는 의사가 되고자 했던 루쉰은 식민지시대 중국인들의 몸이 아니라 정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문학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이를 위해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말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신생(新生)》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자 하였지만, 그 기획은 결국 여러 가지 현실에 부딪혀 아예 좌초되어 버렸다. 처음 루쉰과 의기투합했던 세 명의 사람마저 장래의 꿈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루쉰의 절망은 바로 내가 꾸는 꿈에 동참해줄 사람들의 적막,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 어떤 희망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루쉰은 희망이 없는 공간에서 과연 희망을 소리 높여 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면 편하게 죽어갔을 사람을 깨워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하고 있다. 사실 이 정도의 사고(思考)라면 그것은 결코 단순한 절망은 아닐 것이다. 내가 소리쳐 외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존재할 리 없다는 깊디깊은 절망의 심연이다.

루쉰은 어떻게 이러한 희망 없는 적막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는 희망은 미래를 향해 있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으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확신이 타인의 희망을 꺾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자신의 첫 소설인 <광인일기>를 완성했던 것이다.

루쉰의 소설들은 대부분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정치가든 소설가든 누구나 희망이나 절망을 입에 올릴 수 있지만, 자신의 말 속에 담긴 그것이 아직 그러한 적막과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작가는 그가 유일하다. 오늘 우리가 꾸고 있는 불가능한 꿈과 그것에 대한 적막은 우리를 아프게 할 수 있지만, 우리 중 누군가가 여전히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 된다. 그는 소리를 낮추어 희망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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