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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安樂)으로 가리는 안전(安全)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나라 없는 나라』(2015)
▲동학농민군이 전열을 재정비했던 백산의 모습 일러스트레이션/ 오세미 기자

열차 시간이 촉박한 듯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뛰어가는 여자,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는지 시끌벅적한 사람들 속 홀로 바쁘게 노트북을 두드리는 남자, 이른 아침 허한 배를 채우기 위해 빵집에서 산 샌드위치를 급하게 욱여넣는 남자. 아침 8시도 되지 않았지만 용산역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기자는 정읍행 열차를 기다리기 위해 바쁜 사람들 속에서 겨우 의자를 차지했다. 딱히 한 일은 없지만 역 내 사람들로부터 기운을 뺏긴듯한 기분 때문에 의자에 앉아 멍하니 TV 뉴스를 바라봤다. 어제도 오늘도 뉴스에선 같은 내용이었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사모펀드 의혹과 딸 대학 특혜 논란, 일본 불매운동, 북한 비핵화 가능성. 이에 대해 정치인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듯 토론했다. TV 속의 사람들도, TV 밖의 사람들도 모두 바빠 보이지만 서로 다른 나라에 사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백성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로 가려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대원위 한 사람의 힘이나 몇몇 개화당의 힘으로는 구하지 못할 것이오. 하물며 민씨 일족을 일러 무엇하리오. 호의호식하는 자들이야 배만 채워지면 나라가 넘어간들 눈이나 깜작하겠소? 하지만 백성은 그로부터 더욱 험한 꼴을 겪을 것이매 어찌 싸우지 않는단 말이오. 그를 일러 역모라 하면 과연 그렇겠지요.”

기자는 혼잡한 공간을 벗어나 열차를 타고 정읍역에 도착했다. 『나라 없는 나라』(2015)의 배경이자 동학농민혁명의 근거지라 그런지 고요하지만 역에는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소설은 흥선대원군이 역모라 여겨지는 전봉준의 계획을 ‘조선의 마지막 기회’로 여기며 지지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원군과의 만남 이후 전봉준과 접주들은 간신과 탐관오리를 격징하고 왜를 구축할 예정이니 말목장터로 모이라는 통문을 작성해 각 마을의 집강으로 보냈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이들을 해산시키고자 했지만 농민군은 굴하지 않고 근거지를 백산으로 옮기며 계획을 구체화해 나간다. 일본 대리공사 스기무라는 전라도에서 일어난 남풍이 자신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승정원 우부승지 김교진에게 고부 민요를 제압해야 한다는 의사를 전했다.

▲전라북도 정읍시 말목장터 내 위치한 감나무의 모습


기자는 현재에 대한 분노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공존했을 말목장터에 가보았다. 현재 말목장터에는 과거 농민군이 집결했을 감나무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의 끝을 알아서 그런지 홀로 서 있는 감나무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쓸쓸함을 뒤로 하고, 농민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혁명의 불씨를 키웠던 백산으로 몸을 옮겼다. 백산 꼭대기에 오르니 부안과 정읍이 한눈에 보였다. 이곳에 올라 새로운 미래를 그렸을 농민군의 벅참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선의 각 파당이 권세를 장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중략) 하고 민씨당은 또 어떻습니까? 그들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것이니 그들이 취할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개혁을 단행하여 난도를 달래거나 청군을 빌려 소탕하거나. 하지만 이번 난리는 탐관으로부터 빚어졌는데 그들 모두가 민씨의 사람이니 어찌 과오를 자복하겠습니까? 그래서 일본에서는 청군 차병을 수순으로 보고 있습니다.”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남풍은 점차 위세를 키워나갔다. 지리에 훤한 농민군은 정읍천과 황토재 인근에서 전라감영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고 정읍 관아까지 쳤다. 그러나 전라도에서 불기 시작한 바람은 조선 인사들과 일본 관리들에게 달갑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청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궁정파, 일본과 손을 맞잡고자 하는 개화파,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일본, 과거의 가치를 수호하고자 하는 대원군,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동학군. 이 분주한 대립 속 남풍의 위세는 얼마 못 가 꺾이기 시작했다. 동학군은 홍계훈 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신식 무기의 위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한다. 이후 전봉준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 병사가 상륙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조정이 안락을 독점하기 위해 맞바람을 일으켜 백성을 쫓고 나라의 안전을 판 것이다. 조선이 전쟁터로 변할 것을 우려한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을 찾아가 자신들의 해산으로 외병이 물러난다면 기꺼이 해산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전라북도 정읍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모습
▲황토현 전적지에 위치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의 모습


기자는 남풍이 거세게 불었을 황토재에 가보았다. 현재 황토현 전적지에는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과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보란 듯이 세워져 있지만, 과거 남풍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후세는 그의 행보를 기리고 있지만, 과거 역모라며 무참히 짓밟혔을 그의 목소리가 황토재에서 울렸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황토현을 둘러보다 마지막으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보러갔다. 기념탑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벅차오름이 아니라 암담함이었다. 백성을 보호해야 할 나라가 외세를 불러 백성을 쫓아내는 상황에서 ‘해산’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전봉준의 심정이었으리라. 

“지금 외병이 궁을 침탈하는 중이오. 가봐야겠소.”
(중략) 궁을 사수하기 위해 외병의 침입에 맞서 싸우는 병사들은 평안감영 소속의 기영병이었다. 안경수가 총을 놓고 물러나라는 임금의 분부를 낭송하였다.
(중략) “이것은 나라가 아니다! 나라는 없다!”
총을 동강 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자는 입고 있던 군복을 갈기갈기 찢었다.

남풍은 일본으로부터 불어온 거대한 바람으로 인해 사그라들 위기에 처했다. 일본은 임금으로 하여금 궁궐에 들이닥친 일본군과 싸우는 병사들에게 무장해제를 명하도록 했고, 조선을 맘대로 주무르기 위해 대원군을 권좌에서 밀어내 고종의 복귀를 주도했으며, 동학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남풍은 위기에 처했으나 조선 곳곳에서 새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철래는 미래의 장인이자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김교진에 등을 돌렸으며,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은 무장해제당한 조선군의 소식을 듣고 반란군만이 조선의 힘이라 여기며 이들에 대한 지지를 표했다.
한순간 지켜야 할 나라를 잃은 병사들이 있었을 경복궁 관문각 터에선 상실감이 전해졌다. 국민의 힘이 나라의 힘이지만 조정은 백성을 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안락(安樂)은 보고 안전(安全)은 보지 못한 나라, 백성을 없애고 허물만 남은 나라에선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한 위험이 덮치기 마련이다. 안락에 눈이 멀어 위험을 보지 못한 이들과 닥칠 위험을 알지만 외세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들, 그런 자들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이들이 공존했을 궁을 보니 안타까움만 커졌다.

“내일은 큰 싸움이 날 텐데…… 선생님은 안 무서우세요?”
전봉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너는 무서우냐?”
“무섭습니다. 무섭고말고요.”
(중략) “받아먹지 못한 환곡을 갚고, 노상 부역에다 군포는 군포대로 내는 세상으로 다시 가겠느냐? 양반의 족보를 만드는 데 베를 바치고 수령들 처첩까지 수발을 들면서 철마다 끌려가 곤장을 맞을 테냐?”

일본이 일으킨 바람은 제법 거셌다. 우금티(우금치)에서 농민군은 관군, 일본군과 50여 차례 큰 싸움을 벌였으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각한다. 더 이상의 싸움은 어렵겠다고 판단한 전봉준은 피신하지만,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민보군에 잡히고 만다. 
기자는 농민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곳을 찾아가 보았다. 이곳에서 농민군은 자신들을 보호해야 하는 조정으로부터 공격받고, 관군을 무장해제했던 일본군을 쳤을 것이다. 반란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임금은 일본군을 동원해 이들을 제거하려 했고, 일본군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백성을 죽였다. 서로가 서로의 적이자 보호 대상이었던 역설적인 공간에 있자니 혼란스러웠다. 대체 적은 누구이고 무엇을 지지해야 하는가? 사방이 적이기에 더욱 두려웠을 농민군을 생각하니 기자에게도 씁쓸함이 밀려왔다.

농민군의 발자취를 따라 종일 전라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기자는 기차가 오기 전까지 대합실에서 쉬기로 했다. 여전히 대합실 TV에선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사모펀드 의혹과 딸 대학 특혜 논란, 일본 불매운동, 북한 비핵화 가능성에 관한 뉴스가 보도됐고, 이에 대해 정치인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소현 기자  sohyun0911@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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