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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김근식 옮김, 열린책들, 2000.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 서은혜 교수가 추천하는 『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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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무또프, 다른 개성에 대한 한 개성의 교류가 교류를 받은 자의 운명에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 알겠는가? 거기에는 완전한 삶이 있고, 우리에게 숨겨진 무수한 가지들이 싹트고 있는 걸세.”

“나는 나무 옆에 지나가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뭘 보고 다니는 거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어린 아이를 바라보세요. 신이 선물한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세요. 풀잎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바라보세요. 당신을 쳐다보며 사랑하고 있는 눈을 바라보세요”

 

서로 다른 시간과 삶의 결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때로는 무한한 인내와 이해를 필요로 한다. 머리로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오롯이 삶 속에서 되새기며 매순간 스스로의 마음과 행동을 다스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남들을 앞서고, 무언가를 쟁취해야 하며, 심지어는 그것만이 유일한 지상 목표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이러한 인내와 이해는 때로는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에서 백치 공작으로 여겨졌던 미쉬낀이라는,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그려낸다. 작가가 말하는 선량함이란 어린아이로 살아간다는 것, 나무 옆을 지나가며 행복을 느낄 줄 아는 것, 그리고 언제나 정직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다른 이들의 말을 믿는 것이다. 어떤 일을 겪게 되어도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의 모욕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그 건강한 내면의 힘으로 타인을 연민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도 하나의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또한 사심 없이 타인을 바라보고 그들의 삶의 결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다른 이를 판단하지 않고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하나의 선량함이라고 말한다. 미쉬낀은 껠레르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의 괴리와 또쯔끼에게 기만당한 이후 자신의 삶까지도 증오하는 여주인공 나스따시야의 자포자기와 변덕,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이뽈리뜨의 끝갈 데 없는 우울과 의심을 포용한다. 또한 그는 로고진의 집요한 소유욕과 질투심,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기만하며 조롱하는 레베제프의 교활함, 과거의 영광을 부풀리며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이볼긴 장군의 허세까지, 모두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한다.

미쉬낀이 보이는 단순하고 명확한 진심은 그와 만나는 다른 이들이 스스로의 감옥에서 한 순간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다. 나스따시야는 다른 이들이 볼 때 종잡을 수 없는 편력을 일삼는 타락한 여자이지만, 미쉬낀에게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상처 내는 가련한 존재일 뿐이다. 미쉬낀은 그런 나스따시야를 한눈에 알아본다. 이처럼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과 공간을, 혹은 순간의 즐거움을 공유한다는 의미를 넘어서게 된다. 서로의 운명에 새로운 물결을 불러일으키고 그 물결을 감내하겠다는 의연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진심만으로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할 것이다. S공작이 미쉬낀에게 말했듯, 아름다운 마음씨만으로 지상낙원을 만들기는 어렵다. 그러나 살다보면 때로는 생각과 다르게 껠레르, 이볼긴, 나스따시야, 로고진, 이뽈리뜨가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거창하게 세상을 구원할 것은 아니라도, 거듭되는 실패와 상처로 자신과 타인, 세상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올 때 미쉬낀의 목소리를 듣고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워 내는 것은 어렵지만, 연꽃의 빛깔과 향기를 잊지 않고 꾸는 꿈은 여전히 필요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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