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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현진건’과 함께 불국사를 걷다비범한 능력을 갖춘 선조와 평범한 돌의 만남, 수필『불국사 기행』(1929)
▲토함산에 위치한 석굴암 내부의 모습/ 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당시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위치한 불국사와 석굴암을 가곤 했지만, 굳이 왜 경주를 갔고 가서 무엇을 봤는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기자 역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문화유산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기에 석굴암과 불국사의 인상은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때문에 기자는 이전의 경주 방문과 달리 “어떻게 하면 문화유산을 풍부하게 눈에 담을 수 있을까?”라며 스스로 고민을 해본 끝에, 소설가 현진건(1900~1943)의 수필『불국사 기행』(1929)을 읽고 그의 수필에 나온 표현을 음미해 가며 그의 관찰 순서를 따라가기로 다짐했다. 어릴 적 친구들과 갔던 수학여행과는 달리, 홀로 서울에서 경주까지 5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이동한 기자는 태풍과 비바람을 맞으며 지친 몸을 이끌고 불국사 후문으로 향했다.
오전 7시경 불국사 후문에 도착했을 때, 기자의 눈앞에 펼쳐진 불국사의 첫인상은 그저 풀과 나무가 깔끔하게 정리된 대학로 느낌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기자는 못내 아쉬움을 느꼈다. 그로부터 약 10분 정도 걸었을 무렵, 작가가 보았던 불국사 대문과 함께 동·서로 각각 하나씩 있는 층층대(層層臺:돌로 만든 계단)가 보이기 시작했다.

▲불국사에 위치한 층층대의 모습

 

“뒤로 토함산(吐含山)을 등지고 왼편으로 울창한 송림을 끌며 앞으로 광활한 평야를 내다보는 절의 위치부터 풍수장이 아닌 나의 눈에도 벌써 범상치 아니했다. 더구나 돌층층대를 쳐다볼 때 그 굉장한 규모와 섬세한 솜씨에 눈이 아렸다. (중략) 인도자의 설명을 들으면 옛날에는 오늘날의 잔디밭 자리에 깊은 연못을 팠고, 아치 밑은 맑은 물이 흐르며 그림배(畵船)가 드나들었다 하니, 돌층층대를 다리라 한 옛 이름의 유래를 터득할 것이다. 층층대 상하에는 손잡이 돌이 우뚝우뚝 서고 쇠사슬인지 은사슬인지 둘러 꿴 흔적이 아직도 남았다.”

작가는 두 개의 층층대를 걸어 오르며 직접 만져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현재는 출입 금지구역으로 지정돼 있어 접근할 수 없기에, 작가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해 아쉬웠다. 돌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돌기둥에 쇠사슬을 둘러쌌던 흔적으로 표현된 부분은 현재는 부식돼 알아보기 힘들었다. 인도자가 18세기 당시 층층대 근처에 깊은 연못이 있었고 아치에 그림배가 지나다녔다고 말했지만, 기자는 아치의 공간이 두 팔을 벌리면 닿을 너비인 것을 보고 “과연 배가 지나갈 수는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원래는 작가가 관찰한 경로를 따라 층층대를 거쳐 문루(門樓)를 지나 다보탑(多寶塔)을 보아야 했지만, 출입이 금지된 관계로 동쪽 층층대의 우측 샛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곳을 통해 약 30m 정도를 걸으니 곧바로 국보 제20호 다보탑을 볼 수 있었다. 

▲불국사에 위치한 다보탑의 모습

 

“다보탑이 돌로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연한 나무가 아니요, 물씬물씬한(물렁물렁한) 밀가루 반죽이 아니고, 육중하고 단단한 돌을 가지고 저다지도 곱고 어여쁘고 의젓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공교롭게 잔손질을 할 수 있으랴. (중략) 지붕 위에 이중의 네모난 돌난간이 둘러 쟁반 같은 이층 지붕을 받들었고, 그 위에는 8모 돌난간과 세상에도 진기한 꽃잎 모양을 수놓은 듯한 돌 쟁반이 탑의 8모 난간을 받들었다. 석공이 기절했던 것을 물론이거니와, 이런 기상천외의 의장(意匠)은 또 어디서 온 것인고!”

이끼가 끼어 변색되고 균열이 생긴 다보탑의 돌은 세월의 흐름을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노후한 모습에도 다보탑은 기자로 하여금 시대를 앞서간 건축물이라는 위엄을 느끼게 했다. 그 단단한 돌을 찰흙 다루듯 마음대로 다뤘던 옛사람들의 예술적 능력은 단연 돋보였고, 특히 ‘지붕’이라고 표현한 부분 위쪽의 섬세한 모양은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보탑의 모습은 당시 돌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석공의 기술력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기자는 돌을 다룬 석공이 지금 있었다면 시쳇말로 ‘생활의 달인’ 그 이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옆으로 옮기니 곧바로 다보탑 서쪽에 있는 국보 제21호 석가탑(釋迦塔)이 눈에 들어왔다.

▲불국사에 위치한 석가탑의 모습

 

“다보탑의 혼란한 잔손질과는 딴판으로, 수법이 매우 간결하나마 또한 정중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 미인(盛裝美人)(진한 화장을 한 미인)에 견준다면, 석가탑은 수수하게 차린 담장 미인(淡粧美人)(소박한 화장을 한 미인)이라 할까? (중략) 설명자의 말을 들으면 이 탑은 한 층마다 돌 하나로 되었다 하니, 그 웅장하고 거창한 규모에 놀랄 만하다.”

다보탑처럼 석가탑은 상륜부(석가탑은 아래부터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의 복발(覆鉢) 위로는 정교하면서도 아름답게 돌을 조각한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탑의 복발 아래는 이와는 반대로 돌을 간결하게 다듬은 모습으로 넓적하게 쌓인 돌 하나와 기다란 돌기둥 쌍이 여러 개 짝지어져 있었다. 기자는 이 넓적한 돌들을 본 후, 수필을 다시 봄으로써 놀라움을 참을 수 없었다. 수필대로 돌 한 층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었기에 기단부의 돌이 거의 운석 정도의 크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대한 돌을 여러 개 사용해 만든 석가탑의 웅장함까지 가세해 기자는 돌 자체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당시 탑 제작에 기여한 인부들이 쏟아부은 상상도 못 할 만큼의 노력을 상상하자, “이러한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들어간 노력 덕분에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불국사의 전반적인 모습을 감상하고 나니, 태풍의 영향 탓에 비바람이 더욱 거세져 여정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1년에 100일은 안개가 끼고 100일은 비를 토한다는 기후적 특징 때문에 ‘토할 토(吐)’와 ‘머금을 함(含)’를 사용해 붙여진 ‘토함산(吐含山)’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서 마음만은 힘들지 않았다. 약 50분 동안 지친 발걸음으로 산을 오른 끝에 석굴암에 도착한 기자는 ‘석굴여래불’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돌충대를 올라서니 들어가는 좌우 돌벽에 새긴 인왕(仁王)과 사천왕(四天王)이 흡뜬(눈알을 위로 치뜬)눈과 부르걷은(옷소매,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팔뚝으로 나를 위협한다. 어깨는 엄청나게 벌어지고, 배는 홀쭉하고, 사지는 울퉁불퉁한 세찬 근육! 나는 힘의 예술의 표본을 본 듯하였다. (중략) 그(석가여래불)는 살아 움직인다! 그의 몸엔 분명히 맥이 뛰고 피가 흐른다. 지금이라도 선뜻 벽을 떠나 지그시 감은 눈을 뜨고 빙그레 웃을 듯. 고금의 예술품을 얼마쯤 더듬어 보았지만, 이 묵묵한 돌부처처럼 나에게 감흥을 주고 법열(法悅)을 자아낸 것은 드물었다.”

석가여래불을 관찰한 작가는 “그가 살아 움직인다!”라고 표현했는데, 기자가 본 석가여래불의 인자한 얼굴과 전체적인 분위기 역시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움직일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촬영 및 접근이 금지되어 석굴암의 면밀한 관찰이 어려웠지만, 다행히 그곳의 관리자가 기자에게 석굴암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가 말하길 석굴암의 왼손은 하늘, 오른손은 대지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각각 이승과 저승의 민생 구원을 뜻하고 전체적인 모습은 둘의 화합을 이루려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또한 관리자는 팔과 몸통 사이의 빈틈을 둔 것은 국가적으로 대단한 기술력의 반영이라고 기자에게 설명했다. 이러한 석가여래불의 전체적인 모습이 석굴암의 과학성·예술성을 한층 드높인 것이 아닐까.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갈 무렵, 관리자가 “설날과 추석에는 태양이 석굴여래불의 미간을 조준해 비추도록 설계되었다”라고 귀띔했다. 그 모습을 상상해보니 마치 만물주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저절로 겸손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경주 일대를 둘러보며, 선조들의 돌을 다루는 기술력은 이집트 피라미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나라의 예술 감각이 자랑스러웠고 자부심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기자가 촬영한 사진을 다시 보고, 앞선 문화유산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모두 접근 금지라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기자가 초등학생 때는 층층대 계단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이용이 금지되었고, 탑과 석굴암 역시 가까이에서 보기 힘들었다. 이들에 접근할 수조차 없는 상황 때문에 문화유산을 먼발치에서만 바라봐야 하는 현 상황이 야속하기만 하다. 훗날 후손들은 이 아름다움을 교과서로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이 안타깝게 여겨졌다.

*복발: 탑의 상륜부에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처럼 만든 부분

이성연 기자  chan0317@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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