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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식당에 다시는 가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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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과 정의감이 갑자기 나타나 의미 있는 행동의 변화를 만드는 일은 드물다. 주위에서 스쳐 지나가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저러면 안 될 것 같은데’하는 사소한 생각들이 모여 형성된 하나의 가치관이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움직임을 촉구하게 된다. 하지만 사소한 생각들이 한 사람의 완고한 가치관으로 나타나는 과정에는 기폭제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화를 오래 참다보면 언젠가 폭발하듯, 평소 무던한 마음으로 지나쳤던 것들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기자는 오랜만에 가정 식탁 느낌의 밥과 반찬을 제공하는 식당을 찾아 매우 들떠 있었다. 처음 방문한 식당에 대한 어색함과 식사에 대한 기대감을 느끼던 평범한 일상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십여 분이 흘렀을까, 기자는 앞에 놓인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적당히 소란스러운 식당의 흔한 분위기 속에서 혼자 이유 모를 기시감을 느껴야 했다. 기자의 시선은 다름 아닌 ‘밥그릇’으로 향해 있었다. 동행한 친구와 기자의 밥그릇은 크기가 달랐다. 분명 같은 메뉴를 1인분씩 주문했는데, 친구의 밥그릇 크기는 기자의 밥그릇보다 거의 두 배 가량 컸다. 
 
식기가 부족했을까? 설거지가 덜 되어 급히 비상용 그릇이라도 꺼낸 것일까? 주위를 둘러보던 기자의 눈은 다른 식탁에 앉은 이들의 밥그릇만을 샅샅이 관찰하고 있었다. 기자의 착각이 아니었다. 식탁에 앉은 모든 여성 손님들의 앞에는 기자의 밥그릇과 같은 일반적인 밥그릇이 놓여 있었고, 남성 손님들의 앞에는 거의 ‘대접’으로 보이는 커다란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기자와 동행한 친구는 남성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밥그릇 크기가 달랐던 것이다. 주문과 동시에 주문자의 성별이 밥그릇 크기에 반영되는 방식이었다. 누군가는 여성 앞에 놓인 조그만 밥그릇과 남성 앞에 기세 좋게 놓인 커다란 밥그릇을 비교해서 식당 사장님을 ‘아주 센스가 좋으신 분이다’라고 생각할까?
 
흔히 남성은 여성에 비해 식사량이 많은 편이고 여성은 남성에 비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체적 구조와 에너지를 소비하는 양이 다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더 잘 먹는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의 식사량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밥그릇의 크기를 아예 다르게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논리다. 하지만 기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여성과 남성을 꼭 분리해야만 하는 요소들은 분명 존재한다. 생물학적·호르몬의 차이로 인한 신체적 변별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존중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적 통합도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성별의 차이는 맥락에 따라 그 필요성의 크기를 달리한다. 하지만 겨우 밥을 담는 그릇 정도는 굳이 성별의 차이를 만드는 요소로서 기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성별의 차이는 두 성별 간의 배려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로를 미워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불필요한 성별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을 조금씩 없애 나가는 것이 성별 간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자는 밥그릇의 크기로부터 촉발된,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성별 분리의 표지들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그중 ‘겨우 밥그릇가지고’라는 마음으로 쉽게 지나쳤던 것들도 있을 것이다. 기자가 밥그릇을 보며 일상 속 불필요한 성별 분리를 조장하는 것들을 다시금 떠올렸듯 개인의 사소한 시각 변화로부터 성별 논의에 대한 의미 있는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밥그릇 사건’ 이후 기자는 주위에 다소 무심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그 식당에 다시는 가지 않기로 했다.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사소한 모습으로부터 다양한 존재들이 각자의 모습으로 공존하는 세상이 성큼 다가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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