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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던 현실을 마주하다, 『상록수』(1935)

죽어서도 죽지 않는, 상록수 같은 그들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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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소설가 심훈(1901~1936)의 『상록수』(1935)에 대해 한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상록수』는 일제 강점기 시대 ‘청석골’이라는 시골에서 일어난 농촌계몽 운동을 다룬 소설로, 교훈적인 내용도 충실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주인공인 ‘동혁’과 ‘영신’의 로맨스를 적절히 결합해 문학적 완성도 또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들 중 ‘영신’은 안산 샘골(現 상록구 본오동) 지역에서 농촌 계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 최용신(1909~1935) 선생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사실 ‘동혁’의 이야기와 연애사를 제외한 『상록수』의 내용 대부분은 최용신 선생의 일대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차이가 거의 없다. 이에 과연 최용신 선생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소설의 주인공으로 차용이 되었는지, 그리고 안산 시민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해진 기자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을 살았던 최용신 선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 맑은 가을날 안산시 상록구로 향했다.

자동차 정류장에는 청석골의 주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중을 나왔다. “아이구, 웬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 섰나? 장날 같으이.”
하고 영신은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중략) “채선생님 오셨다!” “우리 선생님이 오셨다!”
계집애들은 동요를 부르듯 하면서 영신의 손에 소매에 치맛자락에 매어달려서 까치처럼 깡충깡충 뛴다. 영신은 눈물이 글썽글썽해 가지고 그 꿈에도 잊지 못하던 아이들을 한아름 씩 끌어안고,
“잘들 있었니! 선생님 보구펐지?”
하고 이마와 뺨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1시간여를 지하철을 타고 상록수역에 내려 걷다 보니 동상들이 눈에 띄었다. 거리에는 방문객들이 소설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최용신 거리’라는 이름으로 소설 속 영신과 아이들의 만남을 형상화한 동상과 설명을 덧붙인 표지판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지하철 고가의 기둥에도 『상록수』의 모습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길의 이름도 최용신 선생의 이름을 따 ‘용신로’였다. 기자는 『상록수』라는 소설이 안산 시민들에게 얼마나 큰 감명을 주었는지 알 만하다고 되뇌었다. 그렇게 동상들을 따라 약 10분여를 걸어가자 옛 샘골강습소 터에 위치한 최용신 기념관이 기자를 맞이해주었다.

“여러분은 학교를 졸업하면 양복을 갈러 붙이고 의자를 타구 앉아서, 월급이나 타먹으려는 공상버텀 깨트려야 헙니다. 우리 남녀가 총동원을 해서 머리를 동쳐매구 민중 속으로 뛰어 들어서, 우리의 농촌, 어촌, 산촌을 붙들지 않으면, 그네들을 위해서 한몸을 희생에 바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거듭나지 못합니다!”

기자가 기념관을 방문한 날은 마침 한창 ‘상록수문화제’가 열리고 있던 참이라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정작 기념관 내부는 기자를 제외하면 두어 명 정도나 간혹 들렀다가 금세 나가곤 해 꽤 한산했다. 오히려 조용히 구경할 수 있으니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던 기자는 천천히 기념관 속 사진들과 온갖 자료들을 훑었다. 자료를 살펴 보고 있으니 해설사가 홀연히 다가와 궁금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소설 속 이야기들이 전부 실제 최용신 선생의 이야기가 맞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해설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부분 사실이라는 대답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과연 그의 말마따나 최용신 선생의 일대기는 소설 속 모습 거의 그대로였다. 혈혈단신으로 샘골로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마을 주민들에게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친 것부터 죽기 전날까지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끝내 숨을 거둔 것까지. 기자는 그런 최 선생의 인생 이야기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외마디 감탄사만 이어나갔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기자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기념관 유리에 적혀있던 ‘죽어서도 죽지 않는 것’이라는 글귀가 기자의 마음을 울려대고 있었다.

“여러분, 조금두 설워허지 마십시오. 이 채선생은 결단코 죽지 않었습니다. 살과 뼈는 썩을지언정, 저 가엾은 아이들과 가난한 동족을 위해서 흘린 피는 벌써 여러분의 혈관 속에 섞였습니다. 지금 이 사람의 가슴 속에서도 그 뜨거운 피가 끓고 있습니다!”
(중략) 동혁은 목소리를 낮추어
“사사로운 말씀은 하지 않겠습니다마는, 나는 이 청석골에서 사랑하던 사람의 사업을 당분간이라도 계속하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나마 소용이 되신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길을 밟는 것이 나 개인에게도 가장 기쁜 의무인 줄로 생각합니다.”

 

최용신 선생은 향년 26세라는 짧은 생을 마치고 샘골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았다. 발걸음을 옮겨 기념관 뒤편에 위치한 최용신 선생의 묘를 찾았다. 묘 앞의 기단에는 누가 뒀는지 모를 조화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최 선생의 묘 옆에는 그녀의 약혼자였던 김학준(1912~1974) 교수의 묘도 자리하고 있었다.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김 교수는 최 선생의 죽음 이후 다른 여성과 결혼했지만, 최 선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본 유학을 마치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샘골강습소 자리에 생긴 샘골고등농민학원의 이사가 되어 농민들을 위한 경제학 강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죽거든 최용신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사망 1년 후에 그의 부인이 최 선생의 묘 옆으로 묘를 이장했다. 이 얘기를 떠올리며 기자는 만약 소설 속의 동혁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살아 있었다면 김 교수처럼 영신의 뜻을 이어 청석골에서 강의하다 영신의 옆에 묻히지 않았을까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될 수 있는 대로 인생을 명랑하게 보려고 노력하여 오던 동혁이건만, 너무도 뜻밖에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 보고는 회의와 일종 염세의 회색 구름에 온몸이 에워싸이는 것이다. (중략)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 모양으로, 까닭도 모르고 또한 아무 필요도 없이 제자리에서 맴을 돌며 허우적거리는 것이 인생의 길일까? 오직 먹기를 위해서, 씨를 퍼트리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고 서루 헐뜯고 싸우고 잡어먹지를 못해서 앙앙거리고 발버둥질을 치다가, 끝판에는 한 삼태기의 흙을 뒤집어 쓰는 것이 인생의 본연한 자태일까.’

 

기자는 최 선생의 묘를 뒤로하고 샘골교회 쪽으로 걸음을 이어갔지만, 더 이상의 그의 흔적을 찾기란 역부족이었다. 이미 교회는 현대적 시설들로 탈바꿈한 지 오래였고, 오직 교회 입구의 판자에 적힌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인 최용신 전도사가 농촌계몽 운동을 한 교회’라는 문구를 보고서야 이곳이 소설 속 그 교회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월급이나 타먹으려는 공상버텀 깨트려야 한다’던 영신의 외침이 무색하게도, 기념관 주변은 온갖 상가 건물들과 아파트로 뒤덮여 있었다. 기자는 세속적인 성공을 포기하고 자신의 생을 바쳐 청석골 사람들의 계몽에 힘쓴 영신이 만약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의문을 품었다. 지금의 세상은 상록수의 이파리마저도 시들어버리게 할 만큼 각박하고 물질만을 추구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기념관도 90년대 초반 개발로 인해 강습소가 헐릴 뻔한 것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막아내고 2007년에야 세운 것이라는 해설사의 말을 들으니 마음은 더욱 착잡해졌다. 어쩌면 염세를 걱정하는 동혁의 고민은 지금도 유효한 것이 아닐까.


조금은 씁쓸한 감정을 품에 안은 채 학교로 돌아가기 위한 채비를 할 무렵, 기념관 입구에서 한 꼬마와 해설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목격했다. “선생님, 저 퀴즈 풀고 왔어요!” “오오, 그래? 잘 맞히고 왔어?” “거의 다 맞혔는데 마지막에 하나를 아깝게 틀렸어요.” “아이고, 아깝다. 그래도 잘했어.” 기자는 문득 은연중에 영신과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들에게서 겹쳐보았다. 문화제가 한창인 공원에 부모님의 손을 잡고 나들이를 나온 어린아이들의 모습에는 웃음과 천진난만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기자는 앞서 품었던 의문에 조금이나마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의 모습이 영신과 청석골 사람들이 바라던 훗날의 청석골의 모습은 아닐지언정, 그들이 바라던 아이들의 행복만큼은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때 묻지 않고 잘 지켜지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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