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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 지음, 원광연 옮김,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18

<조선해양공학과> 송무석 교수가 추천하는 『기독교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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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일상이라는 현실이 양심(良心)이라는 우리의 매우 특별한 기능에 틈을 주지 않기도 하지만, 막상 그런 호사(豪奢)가 허락돼도 우리의 판단이 의존하는 근거가 너무 허술하다는 것을 발견하며 오히려 당황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선(善)과 악(惡)에 대한 고민을 한 쪽에 제쳐 둘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불편한 시름이 그저 필수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은 삶의 다양한 요소(要素) 중 하나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하라는 대로, 내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열심히’ 살다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이 다시 같은 질문 앞에 설 뿐 아니라, 이 질문을 애써 외면하며 만드는 우리의 삶이 그저 모래 위에 모래를 쌓는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같은 질문에 힘들어했던 지난날이 떠오르고, 봄기운에 연둣빛을 띠던 우리의 몸과 정신도 아련히 그리워집니다. 최소한 그때보단 확연히 누레지고 생기 잃은 현재 우리를 바라보자니,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의 다른 표현이던 “무엇이 옳은 것일까”라는 의문은 어느덧 “어떻게 죽어야 할까”와 동일한 물음이 돼 우리 앞에 있습니다. 결국 사람으로 살다가 죽기 위해 만사 제쳐두고 치열히 묻고 또 답을 구해야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사람은 죽는다”가 사실이듯 “모든 죽은 사람은 살아있던 적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구체적이고 실재(實在)하는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서로 격렬히 상호작용하며 만들어가는 세상은 우리의 영혼을 확실히 휘어잡습니다. 오늘 안에 내일의 답이 있고, 어제에 오늘의 원인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엄연한 사실의 다른 한 면인 죽음은 까맣게 잊게 되고, 삶이 주어진 시작의 문제로의 접근은 엄두도 못 내게 됩니다. 간혹 그 시작과 끝에 대해 불현듯 떠올라도, 이미 피조(被造)된 현실이 모든 것인 양 인식하는 틀 안에서는 시작의 ‘이전’과 죽음의 ‘이후’가 본질인 창조(創造)와 창조의 주체(主體)에 대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소위 “유한(有限)이 무한(無限)을 담을 수 없다”는 명제(命題)와 닿게 되는데, 결국 답 없이 쳇바퀴 위를 다시 달리거나 허무함에 넋을 놓아야 합니다. 존재, 지혜, 권능, 거룩함, 공의(公義), 선하심과 진실하심에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영(靈)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선언하시는 성경(聖經)의 말씀이 시퍼런 빛으로 번뜩이는 지점입니다.

개혁기독교(Reformed Christianity) 절정기에 살았던 경건하고 탁월한 프랑스 신학자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쓴 『기독교 강요』는 1536년에 초판(양낙홍 옮김)이 출판된 후 여러 증보를 거쳐 1559년 최종판에 이른 기독교 교리의 핵심 요체로서 성경이 참되게 말하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구원과 구원의 서정(庶政),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은총의 수단 등을 ‘역사 안에서 이미 정리된 기독교’의 바른 틀로 설명하는 귀한 책입니다. 인간이 창조된 후 늘 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 견지(堅持)돼 온 그 ‘역사적 기독교’의 골수(骨髓)를 이식받는 기쁨은 말로 표현키 어렵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의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게 이들에게서 떨어져 있음도 깨닫게 됩니다.

숨 막히는 세상의 혼탁함에 힘들어하는 분, 특히 “성경이 과연 그러한가?”라는 물음에 마음이 무거웠던  학생들이 참된 경건의 개혁자가 전하는 메시지에 흠뻑 빠져 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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