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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이여,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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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8년 개띠, B형 남자다.

1983년 3월 본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2020년 2월 말에는 은퇴라는 이름으로 홍익을 떠나게 되었기에 오롯한 37년을 정리하고 그간의 소감을 나누고자 한다.

1학년 시절, 나는 홍대신문사 기자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고 말았다. 필기시험을 거쳐 면접에서 당신이 신문사에 들어오면 나이가 가장 많은데 어떤 마음으로 근무코자 하는가 하는 야멸찬 여기자의 질문이 아직도 생각난다. 33개월 11일 육군 통신병 전역을 하고 다소 늦은 나이에 본교에 입학하였던 것이다. 그 복수심으로 말미암아 홍대신문사 지면에 빈뜨락 시 한 편을 시작으로 사랑과 진실, 바람 부는 날의 수필, 개교 40주년 홍익 축제에 즈음하여, 모의주주총회를 맞으며, 학원 안정법을 통해 본 시대적 조명, 일언 등의 시사글을 게재하게 되었다.

홍대신문사 낙방의 후유증을 떨치기 위해 나는 학생회관 G420호에 위치한 동아리 글샘문학회를 노크하였고 그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2학년 평론부장을 거쳐 3학년에는 6대 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학기 축제 때에는 문헌관 앞에서 백일장을 개최하고, 중앙도서관 앞에서는 시화전과 숲속의 빈터라는 오픈 카페를 운영하였으며 2학기에는 문학의 밤 행사에서 시 낭송회도 하였다. 『한소리』라는 문집도 발간했으며 수시로 문학 토론회도 하였는데, 그래도 갈증이 남은 날엔 학교 앞 임꺽정 혹은 옛촌이라는 학사주점으로 모여 토론을 이어가곤 했다.

경영학과 1학년 때, 과대표에 선출되었다. 행정실로 임시 과대표와 함께 당당하게 인사를 하러 갔는데 이게 웬 말인가, 선출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입학성적 20% 내에 있는 학생만이 자격이 주어진다는 이유였다. 나는 3일 만에 후임 과대표와 교체되었다. 그 복수심으로 말미암아 2학년에는 경영학과 학생회 사무국장을 거쳐 3학년에는 회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더 나아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국장, 과학생회 초대 연합회장(중앙운영위원)까지 말이다. 당시의 학과 분위기는 1학년에는 개강파티, MT, 종강파티, 2학년에도 개강파티, MT, 종강파티, 3학년은 수학여행, 4학년은 졸업여행, 그야말로 낭만이 넝쿨째로 굴러다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하겠다. 그래서인지 캠퍼스 커플도 많이 생겨서 그들은 후일 백년해로를 하게 된다.

체육관에 있는 수영장에서 근로학생을 끝으로, 파란만장한 학생 시절의 임무가 종료되고 졸업식이 임박한 어느 날 입사 시험을 거쳐 본교의 교직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 해 겨울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나의 연애사는 결국 흑역사로 남았지만 말이다.

교직원으로서의 첫 부서는 후생센터라는 신설 부서였다. 교내 40여 대의 자판기와 3곳의 매점, 서점, 문구점을 직접 운영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자체 직원을 선발하고, 많은 근로학생들과 함께 고락을 나누었다. 각 건물 휴게실에는 롯데리아에 있는 일체형 집기를 설치하기도 했는데, 학생이 이용자이면서 운영자가 되는 독특한 형태였다. 20년쯤 운영하였는데 이 부서에서 전반부와 후반부 10년을 담당하였다. 나는 입사 다음 해 5월 21일에 결혼을 하였는데 19년 후 국가에서 그 날을 부부의 날 법정기념일로 지정하게 된다.

이후 학생처에서 12년쯤 근무하였는데 5년은 학생지도 업무, 7년은 후생센터 업무와 함께 국제교류 업무도 관여하였다. 이즈음 특차 성적우수 신입생 30명을 인솔하여 미국 워싱턴주립대학(WSU)에 입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다녀와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는 국제교류센터가 탄생하는 근간이 된다. 또한 1기 라오스 국제봉사단 20명을 인솔하여 다녀왔는데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마, 아빠가 된 단원들과 SNS를 함께 하고 오프라인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취업정보센터에서도 두 번에 걸쳐 5년을 근무하였다. 30대 중반에서는 매년 취업대책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였고, 취업신문을 제작하기도 했다. 홍익대 취업담당관이라는 직책으로 KBS1 9시 뉴스에 2번 출연했으며 월간 직장인 신년 특대호에 베테랑 취업담당관 3인 긴급대담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한국대학신문으로부터 취업에 관한 칼럼니스트로 의뢰를 받은 일이 기억에 남는다. 40대 후반에는 본교 최초로 홍익 취업박람회를 K동 앞에서 개최하였으며, 인크루트 전국 취업박람회도 유치하여 체육관에서 시행하였다. 

산학협력단에서 8년을 근무하였는데 교수님들의 대외연구비를 관리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으나 지식재산권관리규정을 만들고 법과대학 MIP 과정에도 관심을 가졌다. 공학 분야 교수님들의 연구실적 소개 책자도 제작하였고, 산학협력 엑스포에도 수차례 참가하였다. 한국대학기술이전협회 감사로 9년간 재임했으며, 서울지역 대학산학협력단부장단협의회 회장으로도 활동하였다. 이에 힘입어 산학협력공로(개인부문)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지식경제부장관이 수여하는 기술거래사 자격증도 취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밖에 한국연구재단(NRF),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서울시산학연협력포럼(SBA)에서 자문위원 및 심사위원의 경험도 덧붙여 본다.

그 후 공대 행정실을 거쳐 구매팀에 근무하면서 드디어 홍익에서의 37년 끝자락을 바라본다. 되돌아보면 이 인연은 내가 도깨비 주인공이 되어 퀘백의 계단과 언덕을 오르내릴 때 무척이나 아름다웠노라고 회상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홍익에서 겪은 일을 공유했으면 한다.

3월이 오면, 유럽의 관문 프랑크푸르트 거리를 둘이서 걷게 될 것이다. 홍익이여,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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