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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칸, 두 칸, 계단의 이야기를 올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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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 1분 30초 전. 당신은 인문사회관(C동) 8층에 있는 강의실을 가야 한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을 가득 실은 엘리베이터는 야속하게 당신의 눈앞에서 문을 닫고 말았다. 다급해진 당신이 어쩔 수 없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계단. 당신은 핸드폰의 시계를 바라보며 다리를 한껏 뻗어 한 번에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오른다. 이윽고 당신이 8층에 도달했을 때는 아마 속으로 온갖 욕을 계단에 난무하며 숨을 헐떡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수많은 계단과 마주하는 우리는 그것을 오르거나 내려가기 위해 무릎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수고를 한다. 그렇다면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계단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계단, 공간과 공간을 잇다

 


계단은 건물에서 수직으로 나눠져 있는 공간을 밧줄이나 도르래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들이 직접 가로지를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이러한 계단은 크게 4가지의 건축학적인 특징을 갖는다. 먼저 계단은 수직통로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이를 통해 계단은 사람의 이동을 평면상의 수평적인 것에서 입체적인 것으로 확장시켜준다. 두 번째로 형태표현 요소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계단은 형태에 따라 공간을 향유하는 사용자에게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이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는 계단의 폭, 경사, 평면과의 관계다. 폭이 넓은 계단은 사용자에게 위엄 있고 기념비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좁은 계단은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계단의 경사는 얕으면 편안한 느낌을 주고 급하면 고립된 느낌을 준다. 또한 계단은 평면과의 관계에 따라 성격과 특성이 달라지는데, 이는 평면과 계단 형태와의 관계를 말한다. 즉, 계단이 지면에 완전히 굳게 고정되었다면 땅의 성질을 공유하여 안정된 느낌을 주지만, 그렇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라면 다리의 성질을 띠며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이는 인문사회관(C동)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달리 사다리를 올라갈 때 불안한 느낌을 받는 것과 같다. 세 번째로 계단 외의 다른 공간구성요소인 기둥, 바닥, 벽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특징이 있다. 계단은 기둥이나 벽에 종속되는지에 따라, 혹은 어떻게 바닥과 접합되는지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계단은 전이공간으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전이공간은 특별한 성격을 가진 공간과 공간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공간을 말한다. 계단은 전이공간으로서 이질적인 두 공간을 연결시키거나 분리시키고, 공간을 개방시키는 등의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특성들은 전이공간의 위치나 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며, 특히 진입공간과 통로, 중심공간에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도심 속에 놓인 오래된 고궁으로 향하는 계단은 고궁의 내부와 외부를 분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인간사의 계단을 오르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야곱의 꿈>, 1809년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야곱의 꿈>, 1809년


계단은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이 존재하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건물의 수직이동을 담당하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그만큼 계단은 인간사 그 자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계단은 어떤 역할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먼저 고대 오리엔트와 기독교 문명 시대의 계단은 종교적인 의미를 가졌다. 인간에게는 본래 높은 곳을 차지하려는 원초적인 본능이 있었으며, 바로 이런 본능들이 집단화를 이루면서 제일 먼저 형성된 것이 정치권력과 종교다. 높은 곳은 정치적인 힘을 의미했으며, 이는 제정일치가 이뤄졌던 당시 종교적인 절대자의 힘과 동일한 의미였다. 따라서 고대 오리엔트의 계단은 정치적, 종교적 권력의 전유물로서 웅장하고 곧은 모습을 가졌다.
한편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의미의 앙천(仰天)은 수많은 종교에서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으며, 특히 기독교에서 더욱 강조됐다. 기독교에서 하늘은 곧 신이 존재하는 곳이었으며, 종교인들은 절대적인 존재인 신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도달하고자 했다.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했는데, 성경에서는 ‘야곱의 사다리’가 바로 이 역할을 한다. 이 사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계단 형태의 이동통로이며, 그 끝에는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기독교 시대에는 ‘야곱의 사다리’ 개념을 은유적으로 해석하여 계단을 상징화했다.
그리스 시대에는 신전을 받치는 세 개의 기단 외에는 특별히 계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축물이 없었다. 그러다 로마 시대에 들어오면서 계단은 건축미와 기능성이라는 두 관점으로 나뉘어 발전하기 시작했다. 로마 시대에 건축적인 아름다움을 이끈 것은 신전 계단이었다. 당시 도시가 커지면서 건축물들의 크기에 대한 경쟁이 붙었는데, 신전의 경우 그것의 존재를 강조하기 위해 기단을 높이면서 정면에 놓인 계단을 강조했다. 또한 비트루비우스(VIturvius, ?~?)의 『건축 10서』에서는 계단 형태의 원형 극장에 대해 표준화된 객석의 길이와 높이를 명문화하여 규정했다. 이를 통해 당대 사람들이 계단의 기능에도 주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계단의 형식화는 이와 관련한 기능주의에 기초를 다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설계했다는 샹보르 성 실내 이중 나선형 계단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설계했다는 샹보르 성 실내 이중 나선형 계단


한편 르네상스 시대의 계단은 단순히 건축물의 일부분이 아닌, 하나의 예술로 만들어졌다.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계단을 일부가 아닌 독립된 건축물로 사유하며, 자신들만의 기법과 형식을 선보였다. 대표적인 르네상스 건축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통상적인 나선형 계단이 아닌, 이를 두 개로 겹쳐 이중 나선형 계단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구상했다.

오를 수 없는 계단의 이름, ‘계급’

 

▲영화 <기생충> 스틸컷
▲영화 <기생충> 스틸컷


계단은 수직성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예술작품에서 흔히 계급사회로 상징되곤 한다. 특히 이러한 클리셰를 활용한 대표적인 영화에는 <하녀>(1960)와 <기생충>(2019)이 있다. <하녀>는 중산층 가정집에 들어온 하녀가 가정을 해체시키고 지배적인 위치에 오르려는 이야기다. 음악교사로 일을 하던 ‘동식’은 아내 몰래 자신의 집에서 일을 하던 하녀와 관계를 맺는다. 그러다 하녀가 임신을 하게 되자 동식은 아내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실대로 고백한다. 이에 아내는 오히려 하녀에게 낙태하라고 압박한다. 아이를 잃은 하녀는 동식의 아들에게 쥐약이 든 물을 먹여 복수한다. 그는 아들이 쥐약을 먹고 계단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하녀를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동식의 가족은 동식과 하녀와의 불륜이 드러나 자신들이 쌓아온 부와 명예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녀>는 계단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근대화 속에서 벌어지는 계급과 가정 내의 균열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하녀가 스스로 낙태를 하는 곳도, 동식의 아들이 죽는 곳도, 하녀와 동식이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곳도 모두 계단이다. 따라서 영화는 계급의 의미가 담긴 계단을 통해 계급의 추락을 두려워하던 인간이 결국 한없이 나약해지고 추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편 <하녀>의 영향을 받은 <기생충>에서는 계단을 통해 현대의 신(新)계급사회를 담아냈다. <하녀> 속 하녀처럼 상류층 가정인 동익의 집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된 기택의 가족은 그의 집 지하에서 살던 근세를 만난다. 결국 기택 네와 근세는 살인이라는 형태로 상류층인 동익의 가정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만다. 영화 속에서 계단은 상층과 하층을 구분하는 도구다. 이는 우리가 계급을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인 기태가 결국 계단을 내려와 다시 지하로 들어가서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 사회의 계급 간 이동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계단을 마주한다. 우리들이 삶 속에서 마주하는 계단은 비단 우리의 다리로 걸을 수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인생에서 마주치는 크기가 제각각인 계단, 역경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 저마다의 계단을 헤쳐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결국 끝없이 이어진 무한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오늘도 당신은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계단을 견뎌 지나왔을까?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 때에도 우린 그대로야. 계단 한 걸음 한 걸음, 한 칸씩 내디뎌볼 거야. 빠름보다 천천히, 지금 이 바람을 느껴. 멈춰도 괜찮아, 내려가도 좋아.”_ 이진아, 노래 <계단> 中

이경은, 「계단의 전이공간적 특성과 의미확장에 관한 연구」, 한국브랜드디자인학회, 2013.
임석재, 『계단, 문명을 오르다』, 휴머니스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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