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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관통하는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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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들어 한국 미술이 가진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나는 한국 미술계가 특정한 화풍, 사조, 이론 등이 아닌 대표성을 가진 몇몇 작가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흐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미술시장 혹은 학회에서 동시대 한국 미술에 대한 논의가 포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미술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고가에 낙찰되는 작품은 동시대의 것들이 아니다. 미술 시장에서 한국 미술은 아직도 근대에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단순히 한국이 아시아에 속해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오래전부터 우리와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서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일본과 중국의 미술계는 어떠한 상황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 비교적 미술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이 늦게 나타났다. 그러나 일본은 주변국인 중국의 화풍을 따라가기보다는 독자적인 미술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특히 일찍이 벽화나 후스마에(ふすまえ, 문에 그린 장식 그림)를 그리는 독특한 미술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필선을 통해 정신적인 면모를 보여주고자 한 주변 국가들과 달리, 장식성이 농후하게 나타나는 미술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장식적인 미술은 일본 미술계에서 다양한 기법, 형식, 양식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이중에서 일본 미술을 대표하고, 동시대 현대미술에서도 꾸준히 주목받는 형식적 특징은 바로 ‘평면성’이다. 이러한 ‘평면성’은 우키요에(うきよえ,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회화)를 통해 최고로 정점을 찍게 된다. 판화라 는 매체의 특성과 단순하고 장식적인 것을 좋아하는 일본적인 감성이 하나가 되어, 우키요에는 평면성을 최고의 수준으로 구현해 낸다. 그리고 이러한 우키요에가 서양에 알려지며 평면성은 일본을 관통하는 고유한 특징으로 인정 받게 된다. 동시대 현대미술에서 무라카미 다카시(むらかみたかし, 1962~)는 ‘슈퍼플렛(superflat)’이라는 고유한 용어를 창안하여 일본적인 미술의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중국의 경우 오랫동안 중국을 대표하고 아시아를 상징하는 미술로 ‘수묵화’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현대 중국미술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오랫동안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해 오고 있으며, 지금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매우 독특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문화대혁명 시기를 벗어나 80년대 중국에서는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을 주요하게 다루는 전위미술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동시대의 중국 미술은 유머와 조소를 통해 현실에 대한 염세주의적인 입장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중국이기에 나타나는 실상을 관찰하고 폭로하는 예술적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전위미술은 중국인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대표성을 띠는 미술로 자리 잡았다.

  일본과 중국은 각각의 미술을 정의할 수 있는 확실한 정체성이 존재한다. 일본은 고유한 형식을, 중국은 고유한 사회구조를 각자의 정체성으로 확립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정체성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미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반면 한국 미술의 정체성은 확실한 대표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과거라는 시간 속에 정체되어 있다. 이에 따라 한국 미술계에는 화조영모화나풍속화에 나타나는 해학성, 달항아리의 이미지 등에서 벗어나 고유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단색화’는 굉장히 긍정적인 첫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논리적 타당성을 가지려면, 심도 있는 비평적 이론 연구들이 수반되어야 한다. 작가들 또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체성에 맞추어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한국적인 정체성을 찾아내는 고민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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