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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를 이탈하여 재검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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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은 일상의 너무나도 많은 부분을 점령한 채 기존의 것들과의 고리를 끊어버렸다. 익숙하고 능숙했던 모든 일을 무력화시켰다. 가령 우리는 벌써 모니터 앞에서 맞는 두 번째 개강을 맞았다. 이전보다 익숙한 느낌이지만 여전히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다. 또한, 본지의 경우 1학기 원격수업을 진행함에 따라 휴간을 결정한 바 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논의와 우여곡절 끝에 2학기 개강을 하는 지금에야 올해 첫 개강호를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지면에 찍히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 많은 이야기와 앞으로 기자로서 발행할 수 있는 지면의 수를 생각하면 못내 아쉽다.
이처럼 코로나19는 우리가 가던 경로를 이탈하게 했다. 이때 우리 머릿속에서는 “경로를 이탈하여 재검색합니다”라는 알림과 함께 기존의 경로를 되찾아 정상(正常) 범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를 울린다. 코로나19를 종식시키고 정상적이었던 사회로 되돌아가고자. 그 속에서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의 시대가 얼마나 완전한 세상이었는지를 느낀다. 정상적인 수업, 정상적인 업무, 정상적인 만남, 정상적인 경제, 정상적인 일상. 코로나19로 인해 이것들이 모두 망가져 버렸고, 완전했던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게 되어버렸다고 믿으면서. 그리고 우리가 다시 그 일상의 궤도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렇다면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며 기존 사회의 정상성이 완전했음을 깨닫게 해주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바이러스는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믿어왔던 사회의 균열을 발견하고 그 틈을 비집고 더 큰 고통을 주었다. 즉, 우리가 가던 경로가 실은 균열이 가득하고 얼마든지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던 길이라는 것이다. 이때 코로나19는 단순히 생존과 건강과 관련된 전염병으로서의 속성만 갖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19가 가장 먼저 들춰 보인 것은 혐오와 낙인이다. 코로나19 발생 초기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는, 국내로 들어와 특정 지역에 대한 혐오, 그리고 특정 성정체성에 대한 혐오로 그 대상을 달리해갔다. 사람들은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감염 자체를 특정 집단의 책임으로 귀결시킨 채 이들에 대한 낙인과 공포를 방어기제로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혐오는 단지 코로나19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 안에 내재했던 혐오가 바이러스로 인해 현실의 장막을 찢고 모습을 드러낸 것뿐이다.
두 번째는 전염병에서조차 불평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즉,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은 약자에게 더 크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노인과 노숙자를 위한 무료 급식소가 중단되고, 근로취약계층인 임시일용직 일자리는 큰 폭으로 감소했으며, 영업 중단 명령을 받은 자영업자들은 가게 문을 닫았다. 이들에게 방역이란 그들을 지키는 일이면서도 위협적인 존재인 것이다. 흔히 코로나19 등장 이후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라는 말을 쉽게 접했을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단순히 바이러스로 만들어진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을 겪으며 정상이라는 범주로 되돌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그 정상성이 과연 완전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문제 속에서 코로나19가 나타나기 이전에 존재했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전의 사회로 향하는 길에 새겨진 발자국에 다시 발을 얹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당장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더라도 미래에 닥쳐올 위기에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일정한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로의존성’을 벗어나야 할 시점이다. 즉,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새로운 길을 개척할 발을 내딛어야 한다. 그동안 걸어온 발자국을 되새기면서, 새로운 ‘목적지’, 새로운 ‘경로’를 재검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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