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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 2012

<독일현대문학> 이순예 교수가 추천하는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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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나간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한반도 거주민들에게 하늘은 여전히 파란색이고, 정말 한없이 푸르러가는 파란 하늘을 고개 젖히고 넋 빠지게올려다보던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하는 세대가 여전히 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했었다. 그때 푸른 하늘은 정말 높았고 코스모스를 흔드는 바람은 참신선했다. 옛날 일이다. 나 역시 그 옛날이 아쉽고 표변하는 디지털 세상 앞에서는 쩔쩔매는 구세대이지만 7층 연구실까지 후딱 올려다 주는 기계장치들을 일상에서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러면서 푸른 하늘쯤은 행복한 우연의 사태로 받아들일 자세를 거듭 가다듬으며 오늘을 살고 있다. 이따금 한 번씩 은총을 받으며 편하고 풍족하게 살면 그 또한 좋지 않은가! 그런데 그 드높고 맑았던 하늘을 지칭하던 색이 ‘블루’와 같은 계열이라니! 아찔하다.

독감에 걸려도 마스크를 쓴 적이 없었다. 기침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콜록거리면서 뜨뜻한 아랫목을 독차지하고 누워 한참 허송세월을 한 후 콩나물국에 고춧가루 뿌려 땀내고 먹으면 되었다. 감기는 좀 쉬어가라는 신호였지 민폐 유발 요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세상이 정말 달라졌다. 감기 바이러스가 청명함의 표상이었던 가을 하늘과 같은 계열의 색을 가져가다니! 색채의 조합에서도 우리 두뇌는 정말 발 빠르게 새로운 연상방식을 배워야 한다는 말인가? ‘코로나 블루’는 참 낯설고 두렵다. 왜냐하면 새로 배우고 또다시 배워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 같기 때문이다. 날 샐 틈 없이 인식과 언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면 폐기물과 미지의 대상이 뒤섞일 수도 있다. 맨 앞에 뛰어가는 사람과 완전히 뒤처진 사람 사이의 간격이 갈수록 좁아진다. 벌써 그 단계로 진입했을 수도 있다.

사태가 이쯤 되었다면, 앞에 가는 사람과 뒤에 오는 사람을 두루 살피는 일로 충분하지 않다. ‘블루’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진짜 파란색을 보아야 한다. 그 ‘블루’가 문명의 덧칠임을 깨달았을 때, 견뎌낼 힘을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파란색을 ‘블루’로 만든 코로나 역시 감기 바이러스임을 새롭게 떠올려보자. 그러면 감기에는 무위도식이 최고라는 사실도 새삼스러워질 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때우는 일만큼 또 어려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휴대폰 요금을 분초 단위로 계산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래서 그랬더란 말인가? 바이러스 균을 현미경으로 분석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문학과 예술의 힘을 그토록 강조하는 사람들이 기세를 떨쳤던 까닭이! 인류 문명사에는 18세기 계몽주의 시절이 큰 획으로 그어져 있다. 무위도식이라고 해서 헐값으로 처분되는 일이 아님을 절감한 시절이었다. 『데카메론』(1351)을 쓴 보카치오(Boccaccio, 1313~1375)는 페스트균을 감당해야 했다. 그 어지러운 시절, 인간이 스스로 기품을 유지한다는 일 그러면서 피와 살이 부피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의 중요성을 절감한 인물이었다. 보카치오는 활자를 사용하여 그 빈 공간을 문명사에 남겼다. 그가 개척하기 시작한 ‘빈 공간’은18세기 철학자들에 의해 하얀 바탕색의 원단으로 인류문명에 등록되었다. 필수 불가결함도 증명되었다.

박경리의 『토지』는 일제강점기라는, 한반도가 처했던 가장 처절한 시기를 통과하면서 줄거리를 엮어나간다. 주인공 서희의 비현실성을 두고 왈가왈부하지는 말자.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을 흥미진진한 서사로 풀어주는 ‘세이렌’의 역할에 견주도록 하자. 소설은 허구이다. 한마디로 거짓말이다. 하지만 예술은 진리를 알게 해주는 거짓이라는 피카소(Pablo Piccaso, 1881~1973)의 명언을 참고하자. ‘서희’와 ‘길상’의 인연은 거짓이면서도 진실이다. 한반도 거주민들의 삶이 한때 참으로 거짓말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제국주의 침략을 받았던 적이 정말 있었다. 그 회피하고 싶은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비현실적인 인물 서희는 문학적 장치이지만 꼭 필요한 인물이다. 이런 경우를 독일 철학적 미학은 ‘특수’라는 개념으로 정리하였다. ‘특수’는 덧칠된 블루를 폭파하는 힘을 지닌다. 독일 이론가들이 험한 개념들을 쓰는 나쁜 습관을 지니긴 했지만 ‘폭파’라는 말의 변증법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 기껏해야 이 말은 문명의 속도를 따라가지 말고 무위도식하라는 주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에도 무위도식할 필요가 있을 때 꺼내 들 『토지』가 있음을 축복으로 여기자.

 

정리 취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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