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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에 쌓인 역사를 따라가다

“전하, 우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심이 마땅한 줄 아뢰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러는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김훈, 『남한산성』(1979) 中

위 구절은 조선시대의 병자호란이 일어난 시기의 일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소설의 한 구절이다. 이 소설의 구절로 미루어보아 당시 남한산성은 전쟁 시 사람들에게 안전한 대피처가 되어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성(城), 즉 성곽(城廓)이란 적의 습격이나 자연재해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성벽(城壁)뿐만 아니라, 성문(城門)과 적의 침입 시 공격과 방어를 위한 여러 부대시설까지 포함한다. 이처럼 성곽에는 외적의 침입이 많았던 우리 역사에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굳은 의지가 담겨 있다. 성곽에 담긴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성곽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전쟁 속에서 발전한 성곽의 나라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조선을 ‘성곽의 나라’라고 칭했다. 많은 학자들 또한 조선이 수많은 전쟁을 치렀음에도 국가의 명맥을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는 활발한 성곽 건축 덕분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성곽은 빠질 수 없는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성곽은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일까? 초기의 성곽은 주로 산과 물 등 인근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축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형태의 성곽 축조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성곽들은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 속 급하게 축조된 것들이 많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특히 조선 전기에 들어 기술력의 발달과 화약을 사용하는 무기들이 등장하면서 기존 성곽을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성의 방어를 위해 대포를 설치하는 누각인 ‘포루(砲樓)’가 임진왜란 기간 중 보편적으로 도입되어 성곽의 기능을 향상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읍성(邑城)의 중요성이 커진 것 또한 성곽의 발달 요인 중 하나이다. 읍성은 지방의 행정·경제·군사의 중심지로, 산성(山城) 또는 성곽 내부에 위치한 백성들의 안전과 직결된 시설이자 생활 터전이었다. 읍성 안에 살던 백성들은 전쟁이 나면 삶의 터전인 읍성을 버리고 상대적으로 전쟁에 유리한 산성으로 이동하여 적과 싸웠는데, 간혹 적이 읍성을 차지하여 장기전에 돌입했을 경우 산성에 식량과 무기를 조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읍성의 중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읍성의 열악한 군사적 방어성을 지적하며 새로운 성제(城制)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펼쳤다. 이러한 논의 끝에 만들어진 화성(華城)은 그 자체만으로 읍성과 산성을 모두 갖춰 충분한 방어력을 확보하면서 백성들의 생활공간이자 대피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한양도성,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담다

서울성곽이라고도 불리는 한양도성은 서울을 감싸는 내사산(內四山)인 북쪽의 북악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남산, 동쪽의 낙산을 이은 성곽이다. 이렇게 서울을 둘러싼 네 군데의 산을 따라 축조되어 총 길이가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래된 도성으로 남아 있다. 오백여 년의 역사 속에서 한양도성은 굳건한 울타리의 역할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한양도성의 성문은 매시간을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를 따라 여닫았기 때문에 한양 사람들은 성문이 여닫히는 시간에 맞춰 삶을 살았다. 또한 한양도성의 도성문은 ‘국문(國門)’으로서 도성 안팎을 엄격히 구분해 임금이 지내던 도성 안의 의미를 공고히 하는 역할 또한 수행했다. 숭례문(崇禮門)은 도성문 중 가장 격이 높은 문으로 임금이나 사신들과 같이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사대 관계를 유지했던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가장 으뜸이었던 숭례문을 통해 도성 안을 드나들게 하여 예의를 갖춰 맞이했다. 이렇게 지위에 따라 드나드는 문을 구분하던 문화는 ‘장례(葬禮)’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성 안에 살던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면 신분에 따라 일반 백성은 광희문(光熙門)과 소의문(昭義門) 중 하나를 이용해야 했고, 왕실의 경우 숭례문을 이용했다. 이렇게 조선사람들을 좌우하던 한양도성도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07년 일제는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해 한양도성의 철거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도록 했다. 이들은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裕仁, 1879~1926)의 한국방문을 환영하는 성대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숭례문의 좌우성벽을 ‘성벽이 원활한 차량통행에 방해가 된다’며 철거하였다. 이는 한양도성 훼손의 시작점에 불과했다. 이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서소문(西小門) 주변의 성곽이 헐리고,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은 헐값에 팔려 철거됐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일제는 혜화문(惠化門) 바깥쪽을 개발하고 도로를 개설한다는 이유로 도성문 중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혜화문 또한 철거시켜 도성문은 전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1945년 광복이 찾아 왔지만 한양도성의 훼손은 그치지 않고 되풀이되었다. 광복 이후 한양도성 주변에 급격하게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주택들이 무작위로 들어섰고, 일제 잔재처리 사업의 이유로 학교와 공공시설을 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의 중심에 있었던 한양도성은 전쟁의 화를 면할 수 없었다.

이처럼 많은 수난을 겪었던 한양도성의 역사성을 보존하고 계속되는 훼손을 막기 위해 서울시는 1974년부터 도성 중건을 시작했고, 2012년 ‘한양도성도감’을 신설했다. 이외에도 성곽의 잔존 및 훼손 구간에 대한 다양한 복원 노력이 꾸준히 이어진 결과, 현재 전체 구간의 70%, 총 13.1km(2016년 기준) 구간이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지금의 서울성곽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지혜와 더불어 우리 역사의 아픈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인 셈이다.

 

낙산공원에서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마주하다

예로부터 한양도성을 따라 걷는 것을 ‘순성(巡城)’이라고 한다. 『한경지략(漢京識略)』을 편찬한 유본예(柳本藝, 1777~1842)는 “봄과 여름에 한양 사람들이 짝을 지어 성곽 둘레를 한 바퀴 돌면서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순성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소풍이자 유흥거리였다. 500여 년의 과거를 지닌 한양도성 길을 걸으며 그 안에 담긴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느껴보고자 기자는 직접 한양도성의 혜화문(惠化門)에 해당하는 낙산공원에 올라보았다.

서울의 내사산 중 하나인 ‘낙산(駱山)’에는 혜화문에서 시작하여 이화벽화마을, 낙산공원 등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르는 한양도성이 이어져 있다. 혜화역에서부터 시끌벅적하고 복잡한 대학로를 지나 낙산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곧 웅장한 성벽과 함께 산비탈에 위치한 ‘이화벽화마을’이 보인다. 해방 이후부터 노후된 채 방치되어 있던 이 마을은 ‘도시예술 캠페인’의 결과로 현재 아기자기한 식당들과 70여 점의 다양한 벽화들이 자리 잡고 있다. 곳곳에 있는 벽화 덕분인지 마을에서는 전체적으로 알록달록하고 활기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마을을 지나 낙산공원 입구에 도착하면 순식간에 앞서 지나친 벽화마을의 분위기와는 다른 고요함과 예스러움에 사로잡힌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한눈에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예스러운 성곽과 그 뒤로 펼쳐진 현대의 건물들이 서로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느낄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지치지만 도시로부터 멀리 떠날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도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낙산공원에 올라 과거의 모습을 보며 그 여유로움을 즐겨보자.

 

이처럼 성곽에는 우리 민족의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선조들의 호국정신이 깃든 성곽을 지켜내기 위해 지금도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우리는 그 진가를 모르고 무심코 지나치는 것은 아닐까. 잠시 시간을 내어 서울성곽을 걸어보면서 성곽의 진가를 천천히 되짚어보는 것은 어떨까?

 

[참고문헌]

-홍순민, 『한양도성:서울 육백년을 담다』, 서울특별시, 2017

김채원 기자  (won6232@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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