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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건축의 이해

도시경관과 공간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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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라스베가스의 네온사인을 종로의 간판보다 좋아하는가?

  올해 우리나라의 해외여행자 수는 사상 최대치를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국, 동남아, 미국, 유럽 등지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가는 주요 국가들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미국 서부로 여행을 갔을 때 빼놓지 않고 반드시 가는 곳이 라스베가스이다. 라스베가스는 21세기 소돔과 고모라라고 지칭이 될 만큼, 매춘과 도박이 합법화 되어있는 도시이다. 그러한 특별한 조건 외에도 우리가 라스베가스에 가서 느끼는 또 다른 경험은 물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 그런 엄청난 도시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경험은 밤을 잊고 현란하게 쏟아내는 네온사인이 만들어내는 장관이다. 관광객이 사랑하는 도시들은 모두가 다 하나 이상 브랜드화 시킨 이미지들이 있다. 뉴욕은 타임스퀘어와 센트럴 파크, 파리는 에펠탑과 샹젤리제 거리, 런던은 빅벤과 테임즈강을 내세워서 마케팅을 한다. 라스베가스 같은 경우에는 도박과 밤새도록 켜있는 현란한 네온사인이다. 그러나 라스베가스를 상징하는 현란한 네온사인 역시 결국에는 간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서울의 네온사인 광고판은 싫어하면서 해외의 간판에는 열광하는 것일까? 비슷한 예로 홍콩의 밤 거리를 가 보아도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간판들이 도시의 얼굴을 덥고 있다. 그런데 정작 관광객으로 해외에 나가게 되면 우리는 이런 홍콩의 뒷골목의 간판들을 아름다운 그 지역의 특징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모순되는 현상, 즉 자국의 간판은 싫어하면서 외국에 나가서 보는 지저분한 간판에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문화의 사대주의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조건들은 개인의 지식적 배경에 의해서 판단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네온사인 간판에 열광한다. 그렇다면 미국인들도 그럴까? 적어도 필자의 미국인 친구들은 라스베가스의 네온사인 간판을 싸구려 장식이라고 싫어했다. 하지만 재미난 사실은 똑같은 친구들과 대만에 여행을 갔을 때 그곳 거리의 더 지저분한 간판은 좋아했다. 이 같은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간판경관에 대한 판단은 경험하는 사람이 그 간판을 정보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장식으로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미국인들에게 라스베가스의 네온사인은 정보로 인식되어 정보가 과부하 되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홍콩에 가서 한자로 쓰여진 간판을 볼 경우엔 그것들은 모르는 글자이기 때문에 정보가 아닌 아르누보 장식과 같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사람이 서울 종로의 간판을 보았을 때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로 혼란스러워하지만 라스베가스의 네온사인은 색깔있는 조명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종로의 간판보다는 라스베가스의 간판을 더 아름답게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도시경관의 많은 부분들은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 의해서 가치가 평가된다. 특히나 풍경속에서 사인물(Signage) 같은 상징적인 요소들은 사람들 개인의 인지에 따라서 크게 차이를 가지게 된다.

정보로서의 건축

  라스베가스 간판의 경우에서 보이듯이 건축은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서 다르게 경험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건축공간이라는 것은 사람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산물이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이렇듯 주관적인 관점에서 공간의 해석이 달라진다는 관점은 건축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큰 변화를 준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공간은 완전히 다른 객체의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인 해석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과거에는 공간이라는 것을 하나의 물리적인 객체로 보아왔다. 뉴턴 같은 과학자는 시간과 공간을 따로 독립된 객체로 보았고, 그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 같은 근대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법칙들을 고안해 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독립된 것이 아니고 하나로 연결된 개념인 시공간임을 증명해 내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 같은 21세기의 물리학자는 그의 책 “우주의 구조”에서 시공간이라는 것 자체가 실존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의식에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런 최신 물리학의 개념은 건축공간을 주관적 인식의 산물로 바라보는 시각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건축공간을 주관적 인식의 산물로 보는 시각은 현대인에게 필요한 공간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인터넷 안에서 구축된 가상공간과 우리가 태초부터 살아온 현실공간을 넘나들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 인터넷이 상용화될 때 사람들은 이메일 체크와 몇 개 안되는 홈페이지를 들여다 보기 위해서 하루에 한 두시간 정도를 컴퓨터안의 가상공간에서 보내었다. 24시간 중에서 1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전체 삶중에서 12%의 삶이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진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1시간이던 가상공간에서의 시간이 이제는 모바일 스마트폰의 도움으로 시도 때도 없이 잘게 쪼개져서 우리의 현실속에 촘촘히 박혀있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과 현실공간의 구분이 모호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미치오 카쿠”(Michio Kaku) 같은 과학자들은 향후 컨텍트렌즈나 안경을 통해서 우리의 망막에 직접적으로 가상 스크린을 투사하는 기술이 10년내에 상용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기술이 사용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현실에서 바라보는 장면과 가상공간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어서 볼수 있게 되는데 이때는 정말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다. 이미 MIT 미디어랩에서는 1990년대에 안경에 인터넷 스크린을 장착하여 언제든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장치를 선보이면서 이런 경향을 예고한 바 있다. 가상과 현실의 이중적 삶을 사는 것은 사실 오래전부터 해오던 익숙한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루 중 7~8시간 정도를 잠을 자면서 보낸다. 만약에 우리가 8시간을 잠을 잔다면 이는 하루 24시간의 1/3 에 해당되는 시간으로 우리의 삶의 1/3은 꿈의 공간에서 2/3는 현실공간에서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옛 선현 중 장자라는 사람의 “호접지몽”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잘 설명된다. 장자라는 사람이 자신이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너무 현실적이이서 내가 나비꿈을 꾼것인지 아니면 나비인 내가 사람이 되는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 인식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임을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인터넷과 가상공간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공간이라는 것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더 주관적인 인식에 근거를 둔 세상에 살고 있다. 따라서 건축공간이라는 것도 어느 하나의 확정된 물리적 조건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정보의 해석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 인식의 산물로 보는 것이 이 시대에 건축공간을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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