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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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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바삭하고 건조해지는 것 말이야.”
_송지현,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中

지난해 기자가 쓴 S동 211호를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군대를 간다며 동기 기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작별을 고했던 그 기사를. 그렇게 말했던 기자가 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까? 그렇다. 이제 와 이후의 이야기를 전하자면, 기자는 입영 신청을 취소하고 신문사에 남아 다시 부편집국장을 맡았으며 현재는 편집국장이 됐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니 간단한 정정 기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잔류를 결정하고 지금 이 글을 쓰기까지 기자와 신문사는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기자가 신문사에서 계속 활동하기로 했던 이유는 ‘미완(未完)’의 마음 때문이었다. 기자로서 전하고자 했지만 신문에 오르지 못한 말들의 미완, 동기 기자들과 함께 힘든 일을 나누었던 시간의 미완. 이렇게 매듭짓지 못한 마음은 ‘책임’에 대한 의지로 귀결됐고, 기자는 다시 기자실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지난 1학기 본지는 발행을 중단했고, “책임지고 남는 사람들은 바보가 된다”는 말을 부정하겠다던 누군가는 이를 스스로 증명하는 모순(矛盾)을 보여주며 사라져버렸다. 그 시간 동안 기자들은 모두 지쳤고 슬펐고 아쉬웠다. 기자는 어째서 기자의 의지로 받아들였던 책임과 소명은 가시 박힌 목줄이 된 채 고통이 되었을까 생각했다. 편집국장이 된 기자는 무책임했던 이들과는 다르게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고 온전히 신문을 발행하길 바랐다. 이를 통해 잃어버린 본지의 시간이 실은 더 좋은 신문을 만들기 위한 준비의 기간이었음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또다시 기자는 『홍대신문』의 지면을 지키지 못했다. 2학기에 졸업호를 제외해 3번의 발행을 한 본지는 과연 교내 언론사의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자에게 주어진 지면은 이번 호가 마지막이다. 이제 남은 것은 ‘에필로그(epilogue)’뿐이다. 전임 편집국장들이 그러했듯 그간의 활동을 회고하며 촉촉한 회상에 젖으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는 문장들을 적어야 하는 시점이다. 하지만 기자의 3년을 되돌아보면 1년 차의 열정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마음은 단단해지기보다 바삭하고 건조해진 것만 같다. 붙들고 있던 지면이 사라지지 않도록 좀 더 세게 잡을 수는 없었을까? 더 중립적이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때로는 기계적인 중립에 치우쳐 놓아버린 사실들이 있지 않았을까? ‘바삭하고 건조한’ 마음만으로 독자는 고려하지 않은 채 지면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후회 섞인 질문만이 3년 간의 기자 생활 끝에 얻은 전부는 분명 아닐 텐데, 기자의 마음은 또다시 ‘미완’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되돌아온 이곳에서 기자로서의 에필로그에 적힌 문장들에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만 남았다는 것이 슬프다.
하지만 3년 차인 기자와 동기들이 신문사를 떠나더라도 ‘기자’ 호칭이 빠진 우리들의 삶은 이어지고, 남은 기자들은 또 다른 『홍대신문』을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사실 에필로그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프롤로그(prologue)’로 이어진다. 이는 한편으로는 걱정되고 슬프면서도, 희망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준다. 후배 기자들은 지금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자신들의 잠재력으로, 기자가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더 유익한 기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기 기자들은 익숙했던 공간에서 내던져진 채 새로운 지면과 호칭, 일을 찾기 바쁘겠지만, 각자가 신문사에서 얻은 성장통을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기자의 경우 바삭하고 건조해지는 과정에서 책임을 다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무게를 견디는 방법은 터득한 것 같다. 사실 그렇게 믿으려고 한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항상 후회 가득한 에필로그만 쓸 운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또 다른 기회와 삶, 지면이 있다는 것은 에필로그를 바꿀 기회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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