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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되고 싶었던 소외된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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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1818)은 메리 셸리의 작품으로 최초의 SF 소설이다. 작중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오랜 연구 끝에 생명의 근원이 되는 불꽃을 발견하고, 시체 잔해를 모아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생명체는 인간 세상에서 멸시받고 인간에게 적대적으로 변한다. 그 생명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괴물 ‘프랑켄슈타인’이다. 흔히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을 괴물의 이름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일 뿐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괴물의 이름이 없다는 점,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릭터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한번 생각해보자. 이름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째서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었던 것일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이름 없는 괴물은 무엇을 갈망했던 것일까.

빅터가 괴물에게 어떤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괴물은 작중에서 ‘악마’, ‘괴물’, ‘그것’ 등 다양한 형태로 불린다. 빅터가 괴물의 이름을 짓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괴물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꽃>에서는 이런 절이 나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내게로 와/꽃이 되었다.” <꽃>은 흔히 존재의 본질과 이름의 상징성에 대해 노래하는 시로 해석된다. 시에서 드러나듯이 우리의 의미는 이름을 통해서 부여된다. 따라서 이름은 우리가 존재함을 증명해준다. 여기에서 빅터가 괴물에게 이름을 주지 않은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괴물에게 이름을 준다면 그 순간부터 괴물은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빅터에게는 두려움이었다.

작가는 왜 괴물을 이름도 없고 인간 세상에서 멸시받는 존재로 묘사했을까. 괴물이 인간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점에 주목해보면 작가가 이름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괴물을 ‘소외된 자’로 위치시켰다고 볼 수 있다. 소외된 존재가 인간 사회에서 괴물이라 불리며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보면 괴물을 여성의 은유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괴물은 빅터에게 여성 괴물을 만들기를 요구한다. 빅터는 요구를 고심하며, 여성 괴물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가부장제 사회가 무너지는 것을 걱정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이 괴물이 여성의 은유라는 것에 주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괴물이 갈망했던 것은 무엇일까? 괴물은 빅터에게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만들어내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빅터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괴물은 빅터의 아내를 죽인다. 또한 빅터가 기력을 다하고 죽자 자신 또한 죽음을 택한다. 여기서 괴물이 진정으로 갈망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괴물은 자신을 받아주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다. 우리는 자연스레 인간으로 태어나 이름을 얻고 세상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괴물은 인간이 만든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기에 괴물은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만나 자신이 속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고 싶었다. <꽃>에서 빌려 말하자면 괴물은 자신에게 다가와 꽃이 되어주고, 자신이 다가가 꽃이 될 수 있는 관계를 갈망했다. 즉 괴물에게 빅터의 죽음은 자신을 불러주는 존재의 부재, 더 나아가 자기 존재 의미의 소멸을 내포한다. 그래서 괴물이 빅터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어디선가 소외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필자 또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술자리에 초대됐다가 말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앉아만 있던 적이 있다. 당시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내 이름을 불러주고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필자는 그 자리조차 불편하고 외로웠는데 세상에 자기를 불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독일까. 이처럼 어떤 존재에 있어서 이름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름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에게 불리고 존재의 의미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 의미를 생성함으로써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확립한다. 반면 이름이 없다는 것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세상과 관계에서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괴물에게 자신을 불러주고 그에게 의미를 줄 수 있었다면 그는 인간에게 호의적이었을지 모른다. 한 번쯤은 자신 울타리 밖의 누군가가 울타리 안에서 함께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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