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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도전과 비판

‘공화정(공화국)의 역사적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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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그리스는 고대 그리스와 다르다. 과거 그리스에는 하나의 통합국가가 아닌 크고 작은 폴리스(도시국가)가 대략 700개 정도 존재했다. 그중 유명한 폴리스가 스파르타와 아테네이다. 한때 식스팩 열풍을 일으켰던 영화 「300」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스파르타는 강력한 전사들의 국가로, 반면 아테네는 서양 문명과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 BC)는 서양 문명의 결정체인 민주정을 왜 왜곡된 정체로 간주하고 그 대안으로 혼합정(공화정)을 제시했을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라파엘이 그린 ‘아테네 학원’의 일부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라파엘이 그린 ‘아테네 학원’의 일부분)

그리스 북부의 스타게이라(Stageira)라는 작은 폴리스에서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에 아테네로 와서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academia)’에서 수학했지만, 마케도니아 왕국과 친하다는 혐의 때문에 거의 20년이나 살았던 아테네를 떠나야만 했다. (플라톤이 자신의 조카에게 ‘아카데미아’를 물려준 것에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다)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자, 그는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Lykeion)’을 설립하고 12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자,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처럼 아테네인을 타락시킨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현실주의자답게, “나는 아테네인이 철학에 두 번 다시 죄짓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한 뒤, 아테네를 떠났다. 아테네 시민의 권리를 보유하지 못한 외국인으로 아테네 민주정 하에서 겪었던 개인적 경험도 민주정에 대한 그의 판단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페리클레스> (위키피디아)
<페리클레스> (위키피디아)

하지만 그가 아테네 민주정을 반대한 주된 이유는 아테네의 역사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그리스의 신흥 강자로 부상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테네 해군의 수병, 즉 노잡이로 복무하여 큰 공을 세운 노동자 계층이 참정권을 부여받았다. 장군과 신관을 제외한 모든 공직을 추첨으로 선출하고, 공무 담당자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는 등 아테네의 민주정이 크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기존의 패권 국가인 스파르타는 신흥 세력이 두려워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오늘날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 전쟁을 일컫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에 빠져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이 발발하였다. 아테네는 전쟁뿐 아니라 전쟁 중에 발생한 ‘아테네 역병’(아테네 민주정의 완성자로 평가받는 페리클레스도 전염병으로 사망한다)으로 인해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겪었다. 또한 장기적인 전쟁과 정책은 시민단을 크게 분열시켰으며, 빈부 간의 갈등을 더욱 고조시켰다. 물론 아테네는 코린토스 전쟁(기원전 395-387년)에서 승리하고 제2차 해상동맹을 결성함으로써, 과거의 주도권을 잠시 회복했다. 하지만 테베가 신흥 강자로 등장하고, 제2차 해상동맹이 해체됨으로써, 아테네는 다시 쇠퇴하다, 결국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에 패배함으로써 자유를 상실했다. 

아테네의 정치·군사적 쇠퇴는 민주정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을 초래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페르시아의 도움을 원한 과두주의자들이 기원전 411년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을 폐지하고 ‘400인 과두정’을 수립했고, 중도파가 ‘5,000인회’라는 과도적인 정부를 출범했지만, 1년 만에 민주정이 회복되었다.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자, 크리티아스(Critias, 소크라테스의 제자) 등이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과격한 ‘30인 과두정’을 다시 수립했다. 과두정(잔인하고 과격한 정책 때문에, ‘30인 참주’라고도 불린다)은 아테네 시민 중 3,000명만 시민 명부에 등재하여, 그들에게만 무기를 소지하고 재판을 받을 권리를 부여했다. 민주적인 협의체와 배심원 법정(시민 법정)을 폐지했으며, 정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결국 기원전 402년 트라시불루스(Thrasybulus)가 주도한 쿠데타로 과두정이 해체되고 민주 정부가 다시 들어섰다.

<자크-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위키피디아>
<자크-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위키피디아>

민주정을 전복했던 시도가 예외적인 현상은 아니다. 민주정에 대한 의구심과 비판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관한 역사를 서술한 ‘과학적 역사학의 아버지’ 투키디데스(Thucydides),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수사학자 이소크라테스(Isocrates) 등등. 하지만 민주정에 대한 혐오와 비판이 지식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기원전 399년에 발생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그 증거다. 재판은, 민주정 옹호자들이 민주주의 정부를 향한 직접적인 도전과 광범위한 비판을 불식하기 위해 연출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민주정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과두주의자들의 정신적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자들은 아테네의 청년을 타락시키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소크라테스를 기소하였다. 그들은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민주정의 정당성을 선언하려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자들이 만든 무대의 조연이 되길 거부하고, 주연으로 기꺼이 독배를 들었다. 그가 선택한 죽음은 정치적 재판을 기획한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조롱이자 민주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기희생이었다.

누군가 철학자는 ‘태어나서, 생각하다, 죽는’ 단순한 삶을 산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평생을 생각하다 죽었다. 하지만 그의 사유는 결이 다르다. ‘이데아’를 향한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사유를 강조했던 플라톤과 달리, 그는 실재론자로서 경험과 현실에 기반을 둔 사유를 더 중시했다. 여기에 그가 아테네 민주정을 반대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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